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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암리 남근석(男根石)
작성자 관리자

정읍동초등학교 앞에서 칠보(七寶)행 버스를 타고 20여분 달리다 보면 백암초등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
거기에서 좌편으로 흥삼(興三) 부락을 끼고 남쪽으로 20여 분을 걸어가면 칠보면 백암리(白岩里)가 나오는데 백암리 여러 마을 중 원백암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원백암리까지 들어가는 버스도 있으나 드물게 차가 다녀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원백암리 입구에 막 들어서면 당산석(堂山石) 하나가 있는데 이게 남근석(男根石)이다. 그 모양이 꼭 남자의 생식기와 같아서 남근석이라 부른다.
이 남근석이 세워질 때에는 이런 남근형의 당산석이 24개였으나 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 없어지고 한 개가 전해지고 있다.

이 하나 남은 남근석(좌대 높이 : 1.22m, 둘레 : 2m, 男根의 길이 : 1,4m, 둘레 : 밑부분 83cm, 가운데부분 72cm)은 당산나무 아래 말없이 서 있다.
이 당산나무는 수백 년 전에 심어져 큰 고목이 되었으나 몇 십년 전에 다시 고목은 썩어버리고 새순에서 큰 나무가 되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큰 당산나무(둘레 : 3.70m)가 되어 있다. 이 당산나무 아래 약 1m 정도 떨어진 자리에 남근석이 좌대 위에 하늘을 쳐다보고 올라 서 있는 것이다.
모양이 성인 남자의 생식기 모양 그대로다. 남근석 자체는 아주 곧지는 아니하여 약간 휘어있는 모양이다.
그 휘어진 쪽이 당산나무를 바라보게 서 있다. 방향을 말하면 서북쪽으로 남근의 끝이 약간 숙여져 있는데 그게 볼수록 기이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흰 바위가 많다하여 백암리 곧 흰 바위 마을 입구 서쪽에 위치한 이 남근석은 백암마을 옆 두 당산(堂山 : 토지나 부락의 守護神이 있다고 이르는 산이나 언덕)의 하나였는데 이 남근석이 세워질 당시에는 여근석(女根石)도 함께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화강암의 네모난 기단(基壇)위에 원통형의 남근 형태는 희대(稀代)의 신앙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하필이면 남근석이 세워진 까닭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마을에서 일어난 온갖 재액(災厄)을 미리 막고 특히 가난하여 많았던 도둑을 예방하고 마을 대대손손의 건강의 기원과 함께 마을의 무한한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세워졌다 한다.
이 남근석의 덕분인지 몰라도 원백암리는 몇 년 전만해도 130여 호나 되는 근동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정읍(井邑), 서울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 100여 호에 이르고 있다. 남근석이 세워진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마을 노인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300여년 전 이 마을에 살았던 모은 박잉걸(慕隱 朴仍傑)이라는 사람이 세웠다 한다.
모은은 1676년 (肅宗 2年) 백암리에서 출생했으며 효행이 뛰어나 명정(命旌)이 내려졌으며 만년에는 자선사업가로 널리 알려 있었다.
그는 1745년 가을, 구절치 잿길을 닦아 그 잿마루에는
통훈대부박공잉걸치도선시불망비(通訓大夫朴公仍傑治道善施不忘碑)가 세워졌다.

또 이듬해에 굴치(屈峙)잿길을 닦았다. 지금도 당시의 치적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태인(泰仁)에서는 태거교(泰居橋)를 관리하는 문제가 큰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었는데 모은은 사재(私財)를 털어 장대석(長大石)으로 완고한 큰 다리를 놓아 주었으니 그게 태인의 대각교(大脚橋)다. 또한 칠보면 반곡리에 있던 석탄사(石灘寺)도 모은이 지은 것이었다.
백암초등학교가 있는 부락을 흥삼(興三) 부락이라 하는데 이 흥삼을 '걸치기'라 하기도 한다. 그럼, 걸치기란 어디서 유래했던가?
모은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항상 덕을 쌓은 훌륭한 분이었다. 모은은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대문을 열어 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게 하였으며 곡식을 나누어 주곤했다.
그리고 주민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에 막을 치고 거기에 옷과 신발을 걸어 놓고 가난한 사람이 어느 때고 누구든지 입고 신을 수 있도록 했다.
그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옷과 신발을 걸어 둔 곳이라 하여 '걸치기'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도, 이 곳을 걸치기라 부르고 있으니 그의 자선(慈善)은 천추에 빛나는 공적이요 대덕(大德)으로 남아 영원할 것이다.
이 백암 마을에는 하나 남은 남근석 말고도 몇 개의 바위가 있다.
남근석에서 조금 떨어진 (약 10m)곳에 사람 얼굴이 새겨진 바위가 서 있고, 남근석에서 동쪽으로 가까운 거리(약 70m)에 또 사람 얼굴이 새겨진 바위(높이 약 2m, 둘레 2m)가 백암마을 김창기씨의 논 속에 서 있다.
이 두 선돌을 주민들은 할아버지 망부석이라 부르고 백암마을 뒤쪽 당산나무 아래 큰 바위 3개가 있는데 이 바위를 할머니 망부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정월 초사흗날엔 동네에서 곡식이나 돈을 거두어 음식을 장만하고 남근석이 있는 당산, 할아버지 망부석, 할머니 망부석에서 당산제(堂山際)를 지내며 동네의 무사와 풍년을 빈다.
음력 초사흗날에 만약 동네에 불길한 일이 있으면 당산제는 깨끗한 날로 미뤄진다고 한다.

필자가 남근석에 도착했을 때 (1981년 6월 15일) 그 좌대에 흰 종이가 붙은 새끼줄이 여러 개 감겨있었다.
지나는 주민에게 물으니 그게 아들 낳은 방법이란다.
자손이 없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남근석에 와 빌면 꼭 임신이 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밤중에 여인들이 와서 임신의 기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근석, 참으로 드문 입석(立石)임에 틀림없다.
300여 년 전에 세워진 남근석인데 당시 전통적 유교 윤리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노골적인 아니 색정(色情)표현의 대담성이 드러났을까? 조선 미술사에 나타나는 에로티시즘을 대표하는 존재는 혜원 신윤복(申潤福)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은근하면서도 색정적인 것이 특징이었으며 노골적인 작품도 있었다.
한번은 춘화(春畵)를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는 일화도 전하는 걸 보면 남근석도 생각할수록 대담하고 신기하고 흥미롭고 그 가운데 신성(神聖)도 하다.

원래는 24 방위(方位)에 맞춰 24개의 돌이 세워졌다지만 수백 년의 풍상 속에 이제 하나 남은 남근석(지방민속 자료 13호).
그 동안 서 있던 땅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뀐지 몰라도 지금은 백암마을 입구(박신용 씨의 밭과 김현중 씨의 밭 사이에 서 있음)에서 당산나무 하나를 지붕으로 삼고 성애(性愛)의 신성(神聖)을 전해주는 듯 하늘을 향해 침묵할 따름이다.
모은이 언제 세상을 떴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지금도 굴치재 중턱 왼쪽 암벽에 태인현(泰仁縣)에서 새긴 치도비(治道碑)와 수도비(修道碑)가 남아있다.
이 두 비(碑)의 역사적 연대로 미루어 생각할 때 90세 이상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모은은 죽어서 중국의 황태자(皇太子)로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생전에 남을 위해 자선을 많이 하고 불사(佛事)를 성실히 행하여 그 공덕으로 삼신할머니가 중국의 황태자로 다시 점지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중국 어느 황태자가 세상에 태어난지 반년이 지나도록 왼손의 손바닥을 펴지 못하고 쥐고만 있었다고 한다.
하도 이상히 여겨 억지로 손바닥을 펴보니 '朝鮮 朴仍傑 還生'(조선 박잉걸 환생)이라 뚜렷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서 불쌍한 자에 베푼, 거룩하고 아름다운 공적이 죽은들 어디 가겠는가?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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