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전통문화|전설/설화

전설/설화

로딩중입니다...
제목 채정승(蔡政丞)과 귀양실
작성자 관리자

정읍시 북면(北面)에는 귀양실(九良부락)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산을 많이 끼고 있어 숲에 묻힌 듯한 아담한 마을이다.
물 좋고 인심이 후하기로 유명한 마을이기도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 산골 마을이다.
조선 때의 일이었다.
성이 채씨(蔡氏)인데 정승까지 지낸 분이 있었다.
이 분은 덕망이 높고 학식이 뛰어난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분이었으니 남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이러한 채정승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양을 오게 된 것이었다.
항의 한번 못하고 귀양살이를 왔으니 억울한 인생의 한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그러나, 인격이 높은 채정승은 임금을 원망하지 않았고 죄를 덮어씌운 이들을 저주하지 아니했다.
모든 것을 슬픈 숙명으로 돌리고 귀양살이를 했다.
낮이면 산초(山草)를 뜯어다가 책과 더불어 삶을 이어 갔으며 밤이면 밝은 달과 자연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채정승의 가슴은 밝을 날이 없었다.
날마다 생각해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양심을 비춰봐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더구나 귀양살이를 할 만한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러나, 어명(御命)을 받았으니 무슨 방법이 있었으리오.
가난과 우수 속에서 귀양살이 한 지 십년 세월이 흘렀다.
채정승의 손에서는 책이 떨어지질 않았다. 생의 본질과 죽음의 문제, 인간조건에 따르는 온갖 모략과 탐욕과 영욕을 파헤치는 문제에 몰두하기도 했다.
다 허무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채정승은 드디어 한 많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기의 무죄가 백일하에 밝혀지는 날을 꼭 보고 죽으려 했지만 다가온 죽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채정승이 돌아간 이듬해야 그 억울한 누명이 깨끗이 벗겨지고 말았으니 숙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식구들의 비통과 고뇌와 갈등이 오죽했을까? 하물며 그의 영혼인들 오죽이나 가슴아파 어느 곳에 표류하고 있었을까?

채정승의 자손들이 묘소를 찾았으나 묘소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의 법으로는 정승의 묘 옆에는 백성들의 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미리 안 주민들은 채정승의 묘를 파헤쳐 흔적을 없게 하였다고 뒷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정승의 묘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온 마을의 묘를 쓸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채정승의 영혼은 어디서 쉬고 있을까? 뒷날의 소식을 알고 있을까? 긴긴 기다림의 우회로(迂廻路) 저편에 미소라도 한 줌 얻었으리라.
지금도 귀양실 뒤 산골짜기 사람들은 '채서방골'이라 부르면서 먼 옛날의 채정승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목록

  • 관리부서문화예술과/문화예술팀
  • 연락처063-539-517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