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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장춘과(柳長春)과 조석교(朝夕橋)
작성자 관리자

유장춘은 1585년(宣祖18년) 고부(古阜) 장순리(長順里) (現 淨雨面 도장골)에서 출생했다.
본은 문화유씨(文化柳氏)요 자(字)는 화원(華遠)이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효성이 너무나 지극하여 후세에 표본으로 전한다. 늙으신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환 중에 있었다.
갖은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물고기가 병환에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은 날마다 고기를 잡았다.
이 마을 앞에는 전주 감영(監營)에서 태인(泰仁)을 거쳐 고부(古阜)로 통하는 길이 있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다리 밑에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날마다 물고기를 잡았다.
다른 사람과 고기를 잡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의 고기를 잡지 못했으나 유장춘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분이 고기 잡던 웅덩이를 양친지(養親池)라 불렀고 다리를 조석교(朝夕橋)라 불렀다.
어느 날도 폭설을 무릅쓰고 고기를 잡고 돌아왔다.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꿈속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너의 효성은 망극한 것이다. 너의 효성은 천신(天神)의 감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기 많은 곳을 알려주노니 그 방죽을 품어 봐라.』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고기를 잡으러 갔다. 지적해 준 방죽을 찾아가 품었더니 며칠 동안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루는 고기를 잡는데 청어(靑魚)장수 3인이 말(馬) 등에 청어를 싣고 신태인(新泰仁) 시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말 세 마리가 유장춘을 보고는 길을 가지 않고 멈췄다.
말을 매로 후려쳐도 세 마리의 말이 똑같이 움직이질 않았다.
하도 이상하여 마부중 한 사람이 유장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때 유장춘은
『자식으로 태어나서 청어같이 맛있는 고기를 보고도 부모께 올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하늘을 보고 용서를 빌었을 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 효성의 말에 감동된 한 마부가 청어 열 마리를 집어 주었으나 그는 어찌 남의 물건을 그냥 받을 수가 있느냐고 극구 사양하였다.
하는 수 없이 마부가 나중에 돈을 받겠다고 하며 외상으로 가져가라고 권하니 그때야 청어를 받아 들었다.
유장춘에게 청어가 건네지자마자 움직이지도 않던 말 세 마리는 갈 길을 떠났다.
신태인 시장에 도착한 청어 장수들은 값을 알아보니 청어값이 배로 폭등하였다.
청어 장수들은 이것이 다 유장춘의 덕분이라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고 천감(天感), 인감(人感), 물감(物感) 즉 하느님의 감동과 사람의 감동과 짐승의 감동이 한결같이 일어난 일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어머니 이씨(李氏)부인은 1631년(仁祖 9년)에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그의 슬픔과 통곡은 대단했으며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에 묘를 썼다.
유장춘의 효성은 그침이 없었다. 이제는 시묘(侍墓 : 부모의 居喪중에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을 지내는 일)가 시작된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묘소를 지켰다. 유일한 벗은 데리고 갔던 개 한 마리뿐이었다.
개도 그의 효성에 감동했던지 개에 편지를 달아주면 40리나 되는 장순리(長順里) 집에 가곤 했었다 한다.
개는 목에 건 편지를 그의 부인에게 틀림없이 전하곤 했다 한다.
또 신기한 일은 벌어졌다. 그 통에 개가 만삭이 되었던 것이다.
유장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집에 가서 새끼를 낳으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개도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바위밑에 새끼를 낳고 말았다.
효는 만사의 근본인데 축생(畜生)에게도 느낌이 있었던가?
변산은 예로부터 호랑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시묘살이 중 한번은 묘소 바로 옆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말았다.
그 때 유장춘은 무척이나 말라 있었다.
가난해서 먹을 것도 없었지만 원래 시묘살이 할때는 밥을 먹지 않고 죽만 먹는 법이니 영양부족으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자약했다.
호랑이를 보고
『네가 뼈만 남은 나를 먹고 싶은 것이냐?』 하니 호랑이는 한참 노려보다가 그냥 사라져 갔다.
호랑이에게도 그의 효성이 감동되었음은 물론이었다.

3년의 시묘살이가 9월 16일날 끝날 예정으로 되어 있었는데 7월 14일이 아버지의 제일(祭日)이었다.
유장춘은 평소 아버지의 복(服)을 입지 못했던 것이 철천지 한이었다. 5살 때 돌아가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는 큰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7월 11일부터는 아버지의 복을 추복(追服 : 과거의 服을 입는 것 즉 後服)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아내 김씨 부인은 남편의 지친 몸을 돌보기 위하여 닭죽을 쑤어가지고 마을 밖까지 마중을 나갔었다.
아내를 보고 그는
『나는 지금 시묘살이도 마치지 않았는데 이런 불효를 저질러도 좋단 말이요?』 하고 꾸짖으며 죽그릇을 땅에 버려 버렸다.
참으로 드문 효도심의 발로였다.
후세 사람들은 죽그릇이 떨어진 이 다리를 일러 '백죽다리(白粥橋)'라 불렀다.
효자 유장춘은 시묘살이를 계속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50세였고 1634년 (仁祖 12年) 11월 20일이었다. 그 당시 전라감사 원두표(元斗杓)가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고 조정에까지 알리니 1655년 12월 7일 정문(旌門)까지 세워졌다.
뒷날 많은 사람들은 유장춘이 추복으로 시묘살이를 했던 산의 등성이를 추복등(追服嶝) 또는 후복등(後服嶝)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의 자손들은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정각(旌閣)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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