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릎으로 걸어가던 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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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조선(朝鮮)때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삼리(七寶面 詩山里 三里) 부락에 이씨(李氏) 집안으로 시집온 부인 한 분이 살았다. 부인은 성격이 온순하고 착실하며 매우 근실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남편과 함께 적은 농사를 지어가며 때론 품팔이까지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런 중에도 얌전한 부인은 남편이나 집안에 대한 불평 한 마디 없이 살아 나갔다. 그런데, 이 부인에게 걱정이 생겼다. 시집 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몸에 아기가 없었다. 자나깨나 근심 속에 살아갔다. 남편도 아기가 태어나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으니 남편 보기에 항상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도 왜 아기가 없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부인의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날이 갈수록 부인은 우울하고 답답했다. 『스님, 제가 시집 온 지 삼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태기가 없어 혼자서 고민만 하고 있사오니 좋은 방법을 좀 알려 주십시오.』 부인은 이 말을 듣고 아들을 얻은 것처럼 흡족하고 기뻤다. 몸에 아이가 생기기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할 것을 결심했다. 가까운 곳에 미륵불(칠보면 武成里 香桃洞 : 서기 9891년 8월 현재에도 이 미륵불이 있음)이 있었다. 부인은 매일 밤 미륵불을 찾았다. 옷을 짓는 초사흗날이 오면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무명에서 씨를 빼내고, 그 무명을 활로 타서 물레로 실을 자아내 베를 매어(날실에 풀을 먹여 쓰다듬어서 밀려 감음) 베틀에 올린 후, 짜서 그 배를 가지고 미륵불의 옷을 지으면 해가 서산을 넘고 있었다. 그러면, 옷을 하루만에 다 만들어 미륵불에 입히고 기도를 올리고 집에 돌아오면은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또 떡을 하는 초이레날이 오면 역시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쌀을 물에 담갔다. 밤이 깊으면 떡시루를 이고 미륵불 앞에 갔다. 그런데,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갈 때에는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미륵불까지 무릎으로 걸어가는 치성을 드렸다. 부인의 이러한 정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으니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렇게 치성을 드린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은 입덧이 시작되었다. 태기(胎氣)가 분명했다. 그 후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다. 아이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며 미남(美男)으로 태어났는데 점점 자라면서 꼭 미륵불을 닮아 가고 있었다. 몸집이 통통하여 살이 많고 얼굴이 잘 생겨 어디를 가나 미남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 형편도 좋아져 글공부도 많이 시킬 수 있었으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한 번은 비서를 대동하고 서울 성균관(成均館)에 들린 일이 있었다. 그 곳엔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당당히 학자들 사이에 끼어 담론을 펴고 남아로서 빈틈없이 행세를 했다. 유학자 중 한 사람이 이씨의 행동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식한 사람인 것 같아서 유무식(有無識)을 시험하기 위해 축문(祝文)을 가지고 왔다. 축문을 이씨에게 내밀며 『제가 축문을 잘 못 읽으니 선생께서 한 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씨는 늦게나마 참봉(參奉)(조선조 때 관아에 딸린 종 9품 벼슬) 벼슬에 까지 올라 부부 해로하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이참봉의 집터(칠보면 詩山里 三里부락)에는 지금(서기 9891년 8월 1일) 권오중(權五重:75)씨가 살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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