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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릎으로 걸어가던 치성
작성자 관리자

조선(朝鮮)때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삼리(七寶面 詩山里 三里) 부락에 이씨(李氏) 집안으로 시집온 부인 한 분이 살았다. 부인은 성격이 온순하고 착실하며 매우 근실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남편과 함께 적은 농사를 지어가며 때론 품팔이까지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런 중에도 얌전한 부인은 남편이나 집안에 대한 불평 한 마디 없이 살아 나갔다. 그런데, 이 부인에게 걱정이 생겼다. 시집 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몸에 아기가 없었다. 자나깨나 근심 속에 살아갔다. 남편도 아기가 태어나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으니 남편 보기에 항상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도 왜 아기가 없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부인의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날이 갈수록 부인은 우울하고 답답했다.
잉태가 되지 않는 것을 무슨 방도가 있었으리오?
하루는 부인이 집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한 스님이 동양을 와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 스님은 나이도 많고 학덕이 높은 고승(高僧)으로 생각되었다.
염불이 끝나자 부인은 쌀을 한 바가지 퍼서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심정으로 공손히 시주(施主)했다. 이어 부인은 하도 답답한 심정을 풀 길이 없어 스님을 붙잡고 얘기를 나눴다.

『스님, 제가 시집 온 지 삼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태기가 없어 혼자서 고민만 하고 있사오니 좋은 방법을 좀 알려 주십시오.』

스님은 이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소승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큰 걱정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하면 이뤄지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이 곳에서 가까운 지점에 미륵불(彌勒佛)이 있답니다.
거기에 가서 치성을 드리십시오.
가끔 미륵불의 옷도 손수 지어서 입히고 떡도 해서 공양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공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부인은 이 말을 듣고 아들을 얻은 것처럼 흡족하고 기뻤다. 몸에 아이가 생기기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할 것을 결심했다. 가까운 곳에 미륵불(칠보면 武成里 香桃洞 : 서기 9891년 8월 현재에도 이 미륵불이 있음)이 있었다. 부인은 매일 밤 미륵불을 찾았다.
미륵불 앞에 꿇고 앉아 백 여덟 번의 절을 하며 아들 하나 얻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매월 초사흗날은 미륵불의 옷을 지어 입혔고 초이레날이면 떡을 만들어 놓고 치성을 드렸다.

옷을 짓는 초사흗날이 오면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무명에서 씨를 빼내고, 그 무명을 활로 타서 물레로 실을 자아내 베를 매어(날실에 풀을 먹여 쓰다듬어서 밀려 감음) 베틀에 올린 후, 짜서 그 배를 가지고 미륵불의 옷을 지으면 해가 서산을 넘고 있었다. 그러면, 옷을 하루만에 다 만들어 미륵불에 입히고 기도를 올리고 집에 돌아오면은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흔히 아낙네들이 무명을 가지고 옷을 짓기까지의 과정을 치르게 되면 보름도 걸리고 한 달이 걸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 부인은 하루만에 이 일을 해 냈으니 그 정성이야말로 어떻게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또 떡을 하는 초이레날이 오면 역시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쌀을 물에 담갔다.
쌀을 담그면서도 수없이 깨끗이 씻어 부정함이 조금도 없도록 했다. 오후에는 떡을 찌게 되는데 떡찌는 땔감의 나무는 오전에 손수 자기가 산에 가서 해온 마른 나뭇가지를 가지고 떡을 쪘다.

밤이 깊으면 떡시루를 이고 미륵불 앞에 갔다. 그런데,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갈 때에는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미륵불까지 무릎으로 걸어가는 치성을 드렸다.
삼리(三里) 집에서 미륵불까지는 상당한 거리(약 600m)인데 무릎으로 걸으며 떡시루를 이고 미륵불에 도착하면 무릎에서 피가 흐르곤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을 미륵불에 공양드리면서 백 여덟 번의 절을 하고 눈물을 씻으며 돌아오곤 했다.

부인의 이러한 정성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으니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렇게 치성을 드린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은 입덧이 시작되었다. 태기(胎氣)가 분명했다.
부인의 기쁨과 놀라움은 말 할 것도 없고 남편과 시부모님의 기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까지도 모이면 미륵불의 영험(靈驗)을 얻은 것이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후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다. 아이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며 미남(美男)으로 태어났는데 점점 자라면서 꼭 미륵불을 닮아 가고 있었다. 몸집이 통통하여 살이 많고 얼굴이 잘 생겨 어디를 가나 미남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 형편도 좋아져 글공부도 많이 시킬 수 있었으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공부하기를 권유했으나 공부를 하지 않았다. 미륵불처럼 아담하게 잘 생겨 별명이 미륵불로 붙여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서울 출입을 많이 하였다. 서울에 갈 때는 옆에 꼭 사람 하나를 데리고 다녔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비서에 해당하는 사람을 데리고 출입했던 것이다.

한 번은 비서를 대동하고 서울 성균관(成均館)에 들린 일이 있었다. 그 곳엔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당당히 학자들 사이에 끼어 담론을 펴고 남아로서 빈틈없이 행세를 했다. 유학자 중 한 사람이 이씨의 행동으로 보아 아무래도 무식한 사람인 것 같아서 유무식(有無識)을 시험하기 위해 축문(祝文)을 가지고 왔다.

축문을 이씨에게 내밀며 『제가 축문을 잘 못 읽으니 선생께서 한 번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씨는 참으로 입장이 딱했다.
자기의 무식이 탄로 나면 어쩔고 하여 가슴이 탔다. 그러나, 당한 일이라서 얼른 축문을 받아 들고 『유세차(維歲次)…』
하고 큰 소리로 읽는 순간, 옆에 있던 비서가 『선생님, 큰 소리로 읽을 것 없습니다. 조용조용 읽으시면 됩니다.』
하자, 이씨는 입만 들썩들썩 하면서 읽는 척하다가 끝에 가서 『상향(尙饗)』 을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이씨도 평소에 '유세차와 상향'은 알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창피를 당할 자리를 모면했다 한다.
또, 한 번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놀게 되었는데 어느 학자가 종이와 붓을 내 놓으면서
『선생님의 글씨 한 줄을 받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씨는 순간 등골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나, 어차피 별수 없는 일이라서
『그럼, 해서(楷書)로 써 볼까요? 초서(草書)로 써 볼까요?』
하니, 그 학자는
『이왕이면 초서체로 하나 받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씨는 이 순간
『그럼, 초서는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은 데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초서를 한 폭 드리기로 하죠.』
하면서 붓을 비서에게 넘겨주었다.

비서는 눈치 있게 얼른 붓을 받아 들고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내놓으니 칭찬이 대단했다. 이렇게 이씨는 비록 무식했지만 재치가 있어 세상살이를 아무런 흠 없이 덕을 베풀며 살아갔다 한다.

이씨는 늦게나마 참봉(參奉)(조선조 때 관아에 딸린 종 9품 벼슬) 벼슬에 까지 올라 부부 해로하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이참봉의 집터(칠보면 詩山里 三里부락)에는 지금(서기 9891년 8월 1일) 권오중(權五重:75)씨가 살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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