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전통문화|전설/설화

전설/설화

로딩중입니다...
제목 호랑이 타던 효자
작성자 관리자

박덕래(朴德來) 선생은 효자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1812년(純祖 12年)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청계남(梅竹里 淸溪南)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노수(魯洙)였으며 자는 성호(聖昊). 호는 사암(泗菴)이었다.
효자요 자선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1676년 칠보면 白岩里 출생) 선생의 5대손(五代孫)이다.

또 조부(祖父)되는 분도 효도에 출중한 분이었으니 남옹(南翁) 박연진(朴延鎭)이다.
남옹은 인성이 많고 효행이 뛰어 났으며 또한 학덕이 높아 당시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李書九)와 깊은 사귐이 있었으며 87세에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던 분이다.
또한, 부친 박준범(朴準範)이 집안의 전통을 이어 받아 효도로 이름이 높았으니 사암과 그의 부친, 조부 3대에 걸쳐 세상에 드문 효자였으니 사람들은 일문삼효(一門三孝)라 부르기도 했다.

사암은 불행히도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말았다.
어린 나이지만 그 때의 슬퍼함은 형언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사암은 홀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자라면서 그의 효도는 지극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편안하심을 확인하고 밤이 오면 잠자리를 손수 펴드리는 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효성 속에서도 어머니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병석에 있을 때 사암의 효성은 너무도 지극하여 주위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이름 있는 의원을 다 청하여 병환을 돌보았지만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암은 명당을 잡아 지리산의 연맥인 회문산(回文山)에 어머니를 안장(安葬)했다.
즉 묘소는 사암이 살던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진상굴) 청계남(淸溪南) 부락에서 50리 떨어진 순창근 구리면 금성리(금성굴)에 모신 것이다.
회문산은 옛부터 명당이 많다는 산이요 골짜기가 깊고 험한 산이었다.
그러기에 온갖 짐승들이 많았고 대낮에도 호랑이가 여기 저기서 나타나곤 했다.
사암은 어머니의 묘소 앞에 여막(廬幕 : 무덤 옆에 지어 놓고 거처하는 초가)을 지었다.
3년 동안 어머니의 묘소 옆에서 살아야 하는 시묘(侍墓)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때는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
여막에는 별안간 호랑이 한 마리가 오기 시작했다.
한 번 왔던 호랑이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여막의 주위를 맴돌다가 자고 가는 것이었다.
사암이 새벽 일찍 일어나 묘에 곡(哭)을 드리려할 때면 그때서야 숲 속으로 사라져가곤 했다.
오랜 시일이 지나자 호랑이와는 친근한 벗처럼 되어버렸다.
호랑이의 행동을 보면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고 호랑이도 사암의 행동을 보면 금방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이 정도에 이르니 호랑이는 여막에 들어와서 잠을 자는 한 식구가 되고 말았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다. 눈이 하도 많이 내려 산길이 눈으로 다 막히고 말았다.
이럴 때 제일 걱정은 식수였다.
길이 막혔으니 물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사암의 효성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이 가끔 물을 떠다 주고는 갔지만 눈이 산골짜기에 워낙 많이 쌓였으니 다닐 수가 없었다.
그 날 새벽에도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잠이 깨어 일어나니 호랑이가 먼저 나와 있었다.
호랑이는 즉시 사암의 옷자락을 입으로 물고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사암은 호랑이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끄는 데로 따라 갔다.
한참을 따라 갔는데 호랑이가 길을 멈춰서 자세히 보니 웅덩이 하나가 있는데 눈이 녹아 있었으며 물이 고여 있었다.
말하자면 지극히 작은 옹달샘이었다.

사암은 너무도 기뻐서 호랑이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이것이 산신령의 가호와 어머니의 은덕임을 사암은 알 수 있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찾았으니 사암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묘소를 돌보곤 했다.
어머니의 묘소에서 여막을 짓고 시묘생활을 한 지 1년이 된 때였다.
일년만에 돌아오는 소상(小祥)이었는데 때는 2월 16일이었다.
2월이라 하지만 골이 깊은 회문산에는 눈이 거의 녹지를 않고 있었다.
그러나, 눈길을 헤치고 본 집에 가야만 소상을 치룰 수 있었다.
호랑이와 함께 길동무를 해야만 했다.
눈 속을 헤치며 걷기도 하고 호랑이의 등위에 타기도 했다.
호랑이 등에 엎혀 험한 산골의 재를 넘을 땐 사암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랐다.

회문산의 묘소에서 산내면 매죽리(진상굴) 청계남(淸溪南) 본집까지는 산길로만 50리 길이었으니 눈길을 헤쳐 가는 호랑이의 수고가 오죽했을까? 청계남에 도착했을 때 호랑이는 사암을 내려주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새벽녘에 제사를 다 마쳤을 때쯤 호랑이는 마을 어귀에서 사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암은 호랑이를 반가이 맞아 다시 타고 여막으로 돌아 왔다.
이 외에도 집안의 제삿날이나 본가에 꼭 가야할 형편에 이를 땐 사암은 여러번을 호랑이를 타고 왔었다 한다.

사암의 효도는 드문 것이었다.
주민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되었음은 말 할 것도 없고 효도의 명성이 끝내는 조정에까지 알려저 조정에서 명정(命旌)이 내려졌으니 효성의 귀감이었다.
그런데,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사암의 증손자 박종남(朴鐘南)씨가 소장하고 있는 '호랑이 굴레'다.
호랑이 굴레란 사암이 호랑이를 탈 때 호랑이 턱과 목에 감아주던 가죽으로 된 물건이다.
이 굴레를 호랑이한테 씌워 주고 굴레에 달린 두 끈을 잡고서 말타 듯 호랑이를 탔다고 한다.
이 호랑이 굴레(가로:14cm 세로:12cm)의 모양은 밤색 가죽으로 된 정사각형에 가까운 물건이다.
밤색 가죽의 가운데 부분에는 호랑이가 천연색으로 그려진 연분홍의 가죽을 덧붙여 놓아 튼튼도 하고 또 아름답게도 보인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굴레는 흰 가죽(1cm)으로 선(線)을 빙 둘러대어 놓아 본 바탕을 보호했으며 선을 대어 놓은 박음질이 아름답게 되어 있다.
또 이 굴레에는 6개의 원형으로 된 쇠고리(지름:1cm)가 달려 있는데 여기에 작은 끈을 달아 호랑이 목에 매었으며 큰 끈(길이 : 120cm)이 두 개가 달려 있던 것인데 하나는 떨어져 나가 분실되었고 하나 만이 남아 있다.
이 큰 두 끈이 호랑이를 탈 때 손으로 잡아 쥐던 가죽끈이다.

필자가 궁금이 여겨 호랑이 굴레를 꼭 보고 싶다고 했더니 사암의 증손자인 박종남(朴種南 75세 현재 정읍시 칠보면 白岩里에 거주하고 있음)씨가 손수 이 굴레를 가지고 필자를 찾아 주어 박씨 집안의 귀중한 가보(家寶)를 확인(서기 1991년 7월 2일)할 수 있었다.
요즈음 사람이 이런 효행을 들으면 가슴이 얼마나 뜨끔할 것인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효행 앞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옛부터 효(孝)를 은심(恩心)이라 했다.
즉 고마운 마음, 자기 생명에 대한 은혜를 말함이요, 도(道)는 경행(敬行) 즉 고마움을 갚으려는 느낌과 행위를 말함이니 효도란 은심에 대한 경행을 뜻한다고 한다.
사암의 묘소는 매죽리 청계남에 있다고 한다.
사암은 갔지만 세인(世人)의 가슴속을 깊이 울려 주었던 그의 효성이야말로 후세에 높이 평가될 것이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목록

  • 관리부서문화예술과/문화예술팀
  • 연락처063-539-517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