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전통문화|전설/설화

전설/설화

로딩중입니다...
제목 벽송대사(碧松大師)
작성자 관리자

조선 중엽에 태인(泰人) 출생으로 벽송(碧松)이라는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지응대사(紙應大師)라고도 불렀다.
그의 어머니는 용모 단아하고 현숙한 부인이었으나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으니 슬하에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개가(改嫁)는 어려운 처지였으나 끝내는 손을 보기 위하여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으로 개가를 하여 갔다.
거기서 태어난 아들이 벽송대사였다.
벽송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양반과 상민의 차별 대우는 말 할 수도 없었고, 서자라면 아버지나 형제간에도 아버지, 형님을 마음대로 부르지를 못했다.
서자는 제사에도 참례하지 못하고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웬만한 행사에도 나서지 못하는 관습으로 젖어 있었으니 벽송의 어린 시절이란 눈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벽송은 낮이나 밤이나 이런 사회적 모순을 어떻게 해치고 살아 갈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이런 고심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결국 벽송은 중이 되고 말았다.
금이야 옥이야 사랑하는 어머니의 뜨거운 정을 물리치고 훌훌 용문암(龍門菴)이라는 조그마한 절을 찾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벽송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을 공부하여 그 학문이 깊은 경지에 도달했다.
하루는 도강김씨(道康金氏) 집안으로 출가한 누님을 찾아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 누님은 반가와 어쩔 줄을 모르면서 맞아 주었다.
마침 이 때를 놓칠세라 누님은 벽송에게 명당(明堂)하나 잡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벽송은 웃으며 누님의 뜻을 받아 들였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서러움을 잘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누님의 부탁이었기에 벽송은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써 볼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싶어 정성을 다하여 명당을 잡아 주겠다고 했다.

벽송은 누님에게
『누님, 부귀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권세를 원하십니까??br>? 하고 물었다. 누님은 무엇보다도 우선 부자가 되어 배고픔이나 면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벽송은 부귀(富貴)할 명당을 잡아 주었다.
벽송은 그때 누님과 작별하면서 앞으로는 이런 명당을 잡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과 약속을 하고 떠났다.
벽송은 영산(靈山)인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으로 들어가 내소사(來蘇寺)에서 청련암(靑蓮菴)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벽송암(碧松菴)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도 생활을 계속했다.
그 후 누님은 정말 묘한 일이 생겼다.
명당을 쓴 뒤 묘바람이 불어온 것이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어 곧 부자가 되었다.
자손도 자꾸 불어나서 지금도 태인 도강 김씨 하면 재산 넉넉하고 자손 많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동안 벽송의 어머니는 혈육이라고는 하나 뿐인 아들을 찾아 나섰으나 찾을 길이 없던 중 다행히 수소문한 결과 변산에서 수도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을 때 아들을 부둥켜 안은 어머니는 눈물로써 집에 돌아오기를 애원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벽송은 이미 마음이 굳게 다져 있었다.
벽송의 가는 길은 성불(成佛)의 큰길이었다.
어머니도 아들의 높은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없이 아들과 헤어지는 어머니는 한 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어머니는 아들의 옷을 새로 지어 가지고 절에 와서 아들을 만나 새 옷을 입히고 벗은 옷을 가져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 후 약속은 한 번도 어김이 없었다.
후덕하고 현숙한 그의 어머니는 청계(淸戒)를 엄격히 지켜 부녀자가 함부로 영역(靈域)에 들어와서는 못쓴다하여 아들이 있는 암자로부터 10리가 넘는 재에서 아들을 만나 새 옷을 갈아 입히고 헌옷을 가져가곤 했다. 그리하여 그 재 이름을 환의(換衣)재 혹은 환희(歡喜)재로 불렀다.
평소에 어머니가 아들을 만날 때마다 슬퍼한 것은
『나는 너를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너는 수도하여 큰 중이 된다하여도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니 나의 슬픔은 끊임이 없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벽송은
『어머님, 염려 마십시오.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님을 무자손천년 향화지지(無子孫千年 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더라도 어머님 묘소만은 천년을 환하고 향불이 그치질 않을 땅에 묘를 쓸 것이오니 조금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벽송은 도통(道通)하여 이 나라의 대사(大師)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자 땅을 잡아 장례를 모신 곳이 바로 부안(扶安) 땅 봉덕부락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묘소가 만들어진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는 전설이 있는데 정월초하룻 날이나 보름날에 음식을 차려 놓고 향불을 피우며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 집안은 1년 내내 병마도 없고 운수가 대통한다는 것이다.

벽송은 정말 으뜸가는 명당을 잡았던 모양이다.
죽은 사람의 유골을 받은 기(氣)가 어떻게 산 사람에게 옮겨질 수 있을까? 풍수(風水)에서 이것을 친자감응(親子感應) 혹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한다.
산 사람은 몸을 움직이고 항상 사고하고 기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숨결과 식사를 통해 기를 흡수하지만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기(人氣)로 화한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지기(地氣)가 자신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자기의 분신(分身)인 자식에게 그 기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 백년 흐른 지금에도 벽송의 예언은 맞았다하여 부근 주민들은 이 전설을 믿고 매년 그 때가 되면 무덤 앞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있다.
또한 무덤 위에 있는 풀을 뜯어다가 약초로 쓰면 여러 방면에 신통하다는 말까지 있어 그 무덤은 언제나 말끔히 벌초까지 되어 있다고 한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목록

  • 관리부서문화예술과/문화예술팀
  • 연락처063-539-517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