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사" 와 "망부석(望夫石)"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읍사를 생각하면 망부석이 떠오르고 망부석을 생각하면 정읍사가 연상된다. 그러나 "정읍사"와 "망부석"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은 문헌은 없다.
"정읍사"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우리 악서(樂書)인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해오고, "망부석"은 우리의 고대 향토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또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악지」와「신국동국여지승람」에 망부(望夫)의 설화를 기록하고 "악학궤범"에는 가사(歌詞)와 연기(演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시대를 밝힌 기록은 "고려사악지" 뿐인 것이다. 좀 자세히 설명하면 "악학궤범"이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어느 시기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악학궤범"에는 다만 향악(鄕樂)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려사악지"에는 백제(百濟)의 속악(俗樂)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정읍사"를 백제가요(百濟歌謠)라 함은 "고려사악지"의 기록에 근거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읍사"가 고려가요(高麗歌謠)라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고려(高麗史)의 기록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이다.

"망부석"에 관한 문헌의 기록을 다시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삼국속악(三國俗樂) 백제(百濟)
「井邑」(노래이름)
「井邑全州屬縣人爲行商久不至其妻登山石以望之恐其夫夜行犯害托泥水之汚以歌之
世傳有登岾望夫石云」
(정읍은 전주속현이다. 고을의 한 사람이 장사에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가 고개의 돌에 올라 바라보며, 그 남편이 밤에 길을 걷다가 어떤 침해를 받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수렁물에 비유하여 노래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른 고개에 "망부석"이 있다 한다.)
"망부석"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정읍사"의 이야기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정읍현 고적(井邑縣 古跡」

「望夫石」
在縣北十里 縣人爲行商以不至其妻登山石以望之 恐其夫夜行犯害 托泥水之汚以作之 名其曲曰井邑 世傳登岾望夫石足跡猶在 (망부석 현 북쪽 십리(十里)에 있음. 고을 사람이 장사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가 산의 바위에 올라 바라보며 그 남편이 밤길을 걷다가 어떤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수렁물에 비유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그 곡(曲)을 "정읍"(井邑)이라 한다. 후세에 전해오는 고개의 "망부석"(望夫石)의 자취가 지금도 있다.)

「고려사악지」와 같은 내용이나 그 위치와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의 편찬연대를 비교한다면 "고려사"는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이고 "동국여지승람"은 성종(成宗) 때이니 그동안 약 50년의 연대 차이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전자(前者)는 간략하고 후자(後者)는 자세한데 불과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정읍(井邑)의 "망부석"(望夫石)과 "정읍사" (井邑詞)의 상호관계를 밝혀준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여지승람」(與地勝覽)의 자료는 당시 각 군현(郡縣)으로부터 수집해서 올린 자료로 편찬되었던 것이나 "여지승람"의 기록도 정읍현(井邑縣)에서 올린 자료임에 재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조(朝鮮) 말기인 고종(高宗) 25년 (1889年)에 편찬한 정읍현지(井邑顯誌) 고적조(古蹟條)에 망부석(望夫石)이 게재되어 있는데 여지승람(與地勝覽)의 기록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위치의 표시가 없을 뿐이다. 이런 표시가 없는 것은 어쩌면 고종(高宗) 25년 (1889年)에 현지(縣誌)의 기록에는 대개 소재지의 방위(方位)와 거리(距離)가 표시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니까 위의 여지승람(與地勝覽)과 현지(縣誌)의 기록을 살펴 본다면 "여지승람" 편찬 당시인 조선(朝鮮) 초기까지에는 "정읍사" (井邑詞) "망부석"의 소재지가 분명히 전해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統一新羅) 고려(高麗)를 거쳐 조선(朝鮮) 초기에 이르기까지 "정읍사"는 궁중연악으로 또는 속악(俗樂)으로 널리 불려 왔기 때문에 이에 따라 "망부석" 또한 널리 알려져 왔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유학(儒學)이 발흥하면서 완고한 유학자들이 이것을 음사(淫詞)라 하여 한때 폐기되면서 "망부석"도 점점 그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망부석" (望夫石)의 기록은 당시 정읍(井邑) 지방의 야화를 그대로 자료화하여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런 설화가 전해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야담도 들어볼 수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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