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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관광|전통문화|상춘곡|불우헌정극인

불우헌정극인

불우헌정극인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은 다헌(茶軒), 다각(茶角)이라고도 하였으며 1401년(태종 1년) 8월 6일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豆毛浦里: 현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곤(坤), 어머니 죽산 안씨 (竹山 安씨) 의 7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선생은 영광 정씨(零光 丁氏) 로 어려서 부모를 따라 선대의 고향인 영광에 가서 자랐다.

일찍 학문을 닦아 1429년 (세종 11년: 29세)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여 서울의 태학관(太學館) 학생이 되어 수차례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결국은 합격하지 못했다. 선생은 평소의 소신이 척불(斥佛)이었는데 1437년 (세종19년)7월 홍천사 사리전(舍利殿)을 창건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홍천사는 서울 서부 황화방(西部 皇華坊: 현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 있는 절로 태조의 계비(繼妃) 선덕왕후 강씨(宣德王后 降氏)가 승하하니 그 능 옆에 원당 (願堂)으로 세우려다 불교를 금지하는 정책으로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는 사리전 창건이 적합치 않았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아에서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조대왕(太祖大王)은 고려를 멸망케 한 부패했던 불교를 금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세운 탓으로 유생들은 필사적으로 사리전 창건을 반대하였고 특히 태학관생들은 정극인 선생이 앞장서서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하기로 하였다.
왕은 크게 노하여 정극인을 참형(斬刑)에 처하라 하는 것을 이때 영의정 황희(領議政 黃喜)의 간(諫) 으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그는 처가(妻家)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 3칸을 짓고 가호(家號)를 불우헌(不憂軒)이라 하였다.

그 뜻은 세상을 잊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 앞에 흐르는 물을 필수(泌水)라 칭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놓고 자연 속에서 정신을 수양하고 자여질과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고 지도 하였으니 이게 바로 태인 향학(泰仁 鄕學)의 시초이다.

그 뒤 문종(文宗)이 즉위 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는데 그것도 특혜였다. 1451년(문종 1년) 에 문종은 학문은 깊으나 늦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덕망있는 선비로 추천받아 봉직을 하게 되었고 주위의 친구의 권고로 53세인 1453년에 문과(文科) 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주부, 사헌부감찰, 양전관 전부부교수를 거쳐 1469년 8월에 사간원 헌납으로 제수되었고, 얼마후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되었으니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70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야할 정년이 되었다.

이해 정원 6일 벼슬을 하직하고 출발하니 당시 성종은 좌리원종공신에 서훈하고 이조판서 이승서로 하여금 남대문 밖까지 치송케 하였다.

태인에 돌아온 다음해 조정에서 불우헌에게 당면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그리하여 조 정득실 4개조를 올렸으니,

  1. 1. 지방의 훈도는 생원, 진사중에서 선임하되 40세가 넘은 경전에 통달한 사람으로 할 것.
  2. 2. 근래에 불교가 흥성하니 경전을 간행하는 간경도감을 폐지할 것.
  3. 3. 지방의 군수훈령에 대한 이동을 공정히 할 것.
  4. 4. 천첩의 소생이라도 아버지와 같이 차별 없이 대우할 것.

간경도감은 바로 폐지되었다. 성종 3년 3월 24일 대왕은 유서를 내렸다.

"내 들으니 정극인은 청렴한 절개로 세상에 욕심을 두지 않고 오직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열심히 학문을 가르치며 지도하고 있다 하니 퍽 가상한 일이로다. 불러서 벼슬에 쓰고자 하나 연로해서 그럴수가 없으니 특히 종삼품을 내리고 전라도관찰사에 명하여 일체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보살피게 하라"

불우헌은 성은에 감격했다. 이 감격을 노래로 읊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불우헌가이다. 그리 고 성은에 감사하여 성수무량을 기원하는 불우헌곡을 읊었다.

불우헌은 벼슬에서 물러나와 10년 동안 고현내에 머물면서 고현동악을 만들어 후진양성과 고현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산수가 아름다운 고현내의 춘경을 읊은 '상춘곡'을 지었다. 시정(詩情)을 그대로 우리말로 가요화하여 국문학에 새장을 열어준 것이다.

불우헌은 81세 되던해 8월 6일 서거하니 뒤에 무성서원에 배향되고 묘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불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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