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배경

판소리는 대체로 남도 무가와의 깊은 관련 속에서, 17세기 말 경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판소리는 그 근본 토대가 되는 남도 전역에는 문헌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최초의 판소리 관계 문헌으로 1754년에 유진한에 의해 씌어진 『만화본 춘향가(晩華本 春香歌)』이다.
이는 만화 유진한이 호남 지방을 구경하고 쓴 것인데, 이로 인하여 그는 인근 선비들로부터 비난을 당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유진한이 살던 천안 지방에 판소리가 보편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남도 지방에서는 이미 양반들까지도 판소리에 심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판소리사에 등장하는 초기의 소리꾼들 중에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이 많다는 사실만 가지고 남도 지역이 판소리사의 초기로부터 수행해 온 판소리의 기반이 되는 지역으로서의 역할, 곧 판소리의 공급과 소비, 그리고 변화 발전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도 지역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발생과 발전의 기반이 되는 지역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면, 본 조사연구의 대상지역인 정읍지역도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했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 지역은 지금까지 대체로 판소리의 공급지로서 보다는 소비지로서의 기능을 더 많이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정읍 지역에서는 판소리 명인이나 명창들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평가는 남원이나 구례가 수많은 판소리명인 명창들을 배출함으로써 판소리 공급지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수행했던 점에 비추어 내릴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 출신으로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명창도 있으며, 또 이 지역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주요 소비지의 하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무명의 수많은 소리꾼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판소리사의 머리에 놓이는 정읍 지역의 소리꾼은 박만순이다.
박만순은 고부 수금리(현 정우면 수금리)사람으로, 운봉 또는 경상도 안의에서 잠시 거주하기도 했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고부에서 보낸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박만순은 당시 전주에 거주하고 있던, 8명창 중의 한 사람인 주덕기에게 배웠다. 그 후에 가왕 송흥록에게 배워 송흥록의 의발을 받았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박만순에 대해 이르기를, '동파의수령이요, 세소위(世所謂) 8명창 이후 근대 창극조의 출중한 대가'라고 하였다.
박만순은 성격이 오만한 데다 기예가 출중하여 자부와 자만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박만순 이후 정읍 출신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은 백근룡이다. 백근룡은 태인 출신으로 고종 때 인물이다.
특히 「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그 소리가 완벽에 이르고 성망(聲望)이 일세를 울릴 즈음인 40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배웠는지, 어떤 제자를 두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백근룡은 특히 '곽씨부인 거상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고 하는데, 『조선창극사』에는 이 대목이 그의 더늠으로 전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다르지만, 가까이 있는 부안과 고창 등은 정읍 지역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고부, 정읍, 부안, 고창 등이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조선조 때에는 정읍, 흥덕, 부안, 태인현과 고부군으로 이 지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조 말인 고종 때에는 다시 이 지역을 부안, 고부, 태인,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의 일곱 개 군으로 나누었으며, 1909년 들어 일제 통감부에 의해 지금과 같이 정읍, 부안, 고창군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동일한 생활 및 문화권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이 이처럼 동일한 생활 및 문화권역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부안이나 고창의 판소리는 정읍의 판소리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 조사 결과, 특히 일제시대 이후에 이들 지역의 소리꾼들은 정읍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함께 활동한 사실이 빈번히 발견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식민지 시대 이후에는 정읍이 이 지역의 판소리 소비지역할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면밀한 해명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정읍 지역의 판소리 발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신재효이다.
신재효는 고창 사람이지만, 각처의 소리꾼들을 모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 각처의 소리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여러 곳의 소리가 모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신재효의 사랑은 전국의 다양한 판소리가 모이는 백화점과 같았던 것이다.
신재효의 집에 드나들던 소리꾼 중에서도 순창 출신의 김세종, 담양 출신의 이날치 등은 이 지역의 소리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여러모로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의 소리에 끼친 신재효의 영향으로는 크게 판소리 문화의 발전, 판소리에 대한 인식의 재고, 판소리 이론의 정립 들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자신이 직접 개작·정리한 사설을 통하여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신재효의 사설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읍 지역의 판소리와 교섭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안과 고창 지역 소리꾼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전해종
  • 전해종은 부안 출신으로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오랫동안 신재효의 지침을 받았으며, 「숙영낭자전」과 「심청가」를 잘하였다고 한다.
    그이 더늠으로는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환생하는 대목이 『조선창극사』에 전하고있다.
김수영
  • 김수영은 흥덕 출신으로 전해종과 동시대에 활동한 사람이다.
    대가로 칭할 바는 없으나, 서편제 양식의 소리를 했으며, 특히 중모리 장단의 소리를 잘했다고 한다.
    그의 더늠으로는 「수궁가」 중에서 토끼가 수궁으로 들어가는 대목이 있다.
김거복
  • 김거복은 부안 줄포 출신으로 역시 전해종과 동시대 사람이다.
    서편제 양식의 소리를 했는데, 성량의 크고 아름다움에 있어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이 더늠은 「수궁가」 중에서 용왕이 병석에 누워 탄시하는 대목이다.
김창록
  • 김창록은 무장 출신으로 흥덕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동편제 소리로 박만순이나 김세종에 지지 않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심청가」를 잘하였으며, 「춘향가」 중 팔도담배가로 유명하였다.
    또 「산유화가」를 작곡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창조성이 지극히 높은 소리꾼이었던 것 같다.
    그의 더늠으로는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기 전날 밤 탄식하는 대목이 『조선창극사』에 전하고 있다.
백경순
  • 백경순은 부안 출신으로 철종, 고종시대 사람이다.
    「춘향가」를 잘하였으며, 부침새를 구사하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서편제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더늠은 「수궁가」 중에서 토끼가 수궁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대목이라 한다.
김찬업
  • 김찬업은 흥덕 출신으로, 김수영의 아들이며, 순천 출신 명창 오끗준의 생질이라고 한다.
    박만순의 제자인데, 고종 때 대원군의 사랑을 받으며 활동했다고 한다.
    눈이 빛나고 목소리가 커서 호랑이라는 별호를 얻었으나, 만년에 성대를 상하여 부득이 소리를 폐하고 말았다.
    김찬업은 「춘향가」를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의 춘향가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이른바 보성소리 춘향가는 김세종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김찬업은 춘향가를 김세종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김세종은 신재효의 사랑에서 소리 사범 노릇을 하였으니, 아마도 그 무렵에 김찬업은 김세종으로부터 춘향가를 배운 듯하다.
    김찬업의 더늠은 「수궁가」 중에서 토끼화상을 그리는 대목인데, 이는 그의 스승인 박만순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한다.
성민주
  • 성민주는 부안 사람으로 김창환, 박기홍 등과 동시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소리 공부를 하였으나, 이십세 이후에 김세종 문하에서 수업을 쌓은 뒤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특히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를 잘 불렀다고 한다.

이들 이외에도 여류 명창의 비조로 알려진 진채선과, 김세종에게 배워 이름을 날린 허금파 등이 고창 출신이었다.
이처럼 많은 명창들을 배출한 지역의 한가운데서, 백제시대 정읍사 이후 도도한 노래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서 마침내 정읍의 판소리는 만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그것이 판소리 소비지의 역할에 치중한 것이었다고 해도,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정읍 지역의 판소리 문화가 일부 전문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정읍 지역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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