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전계문

전계문은 그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1872년 전기옥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40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적은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창리 49번지이다.
본적란 아래 부분에 그의 직업 표시가 무(巫)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직업적인 무였음을 알 수 있다.
전계문은 주로 당숙인 전도성의 수행고수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전도성의 유일한 생존 제자인 김원술이, 전도성이 전계문을 소개하면서 '조카지만 나이는 나보다 위'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계문의 출생년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을 중시하되, 보다 더 광범위한 자료의 수집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전계문은 그 동안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근세 최고의 명고수, 명무, 명율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원술과 송영주의 증언에 의하면 전계문은 북뿐만 아니라, 춤/한량무, 대금 정악, 양금, 가야금, 거문고 등에서도 당대 최고였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최고의 고수였으며 명무였던 한성준은 자신의 북가락과 춤사위를 전계문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물론 한성준과 전계문은 나이가 두 살 차이밖에 없어서 사제관계를 맺기에는 부적합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성준과 전계문이 교류를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는 한성준의 손님이며 승무의 인간문화재였던 한영숙이, 자기 할아버지가 전계문으로부터 춤을 배웠다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는 송영주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직접 사제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배제 할 수가 없다.
정악의 경우에도 단소의 명인인 전용선, 거문고의 김용근, 대금의 신달용, 피리의 정형인과 임동선, 가곡의 인간문화재 정경태 등이 전계문의 제자인 것을 보면 전계문이 얼마나 훌륭한 율객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실제 향제 풍류와 가곡/반주는 전계문에 의해 그 전통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전계문의 정악은 허창이라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가락은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민속음악의 본질인 계속성, 변이, 선택성에 비추어 볼 때, 전계문의 북가락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에 독특한 자기의 가락이 보태어져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꼭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만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익히는 것도 배우는 것이므로, 전계문이 정읍 지역의 판소리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계문의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아, 그는 특히 창조성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배운 가락을 발전시켜 훌륭한 것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전계문의 북가락은 박창을을 통해서 송영주, 송인섭, 김판철, 주봉신 등에게 이어졌으며, 부분적으로는 정읍의 박홍규와 한성준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계문의 고법 이론은 주로 송영주에게서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전계문은 1940년에 죽었는데, 후손 중에는 음악에 종사한 사람이 없어서 가문의 전통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박홍규

박홍규는 정읍 사람으로 오랫동안 정읍의 예기조합과 정읍국악원에서 총무를 맡아 이를 실질적으로 운영한 사람이다.
박홍규는 흥덕의 아양율계와 정읍의 초산율계에도 회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현재 정읍의 이기열씨가 소장하고 있는 초산율계 계금부(契金簿)에는 1957년 봄에 박홍규가 사망하여 부의금을 지출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바, 박홍규는 1956년 가을부터 1957년 봄 사이에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정확한 출생 연대는 알 수 없다.

박홍규의 북가락은 누구의 것을 계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박홍규가 아전 집안 출신으로서 전도성의 북도 가끔 쳤으며, 1950년대까지 생존했던 고창 흥덕 후포의 김토산과도 자주 교류했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대단한 수준의 고수였던 것은 틀림없다. 당시 정읍 지역의 최고 고수는 전계문이었고, 전계문보다 연하였기 때문에 박홍규가 전계문의 가락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에 대해 수긍한 바 있다.
박홍규의 북가락은 화려한 잔가락에 의존하기보다 실한 원박에 의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중하고 무거운 자세와 멋있는 추임새는 참으로 훌륭하였다고 한다.
박홍규의 북가락을 정식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박홍규가 정읍 예기조합과 국악원의 총무로서 오래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정읍지역의 국악 애호가들에게 끼친 무형의 영향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박창을

박창을은 전계문의 북가락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사람이다.
박창을은 김제군 봉남면 출신으로 1910년경에 태어나서 1980년경에 죽었다고 한다.
본래부터 음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어서 이른바 한량으로 명고수에까지 이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량 명고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악과 관련된 직업적인 활동은 별로하지 않았다.
박홍규나 박창을과 같은 한량 명고수의 출현에는 정읍 지역의 판소리 전통과 판소리의 유흥화라고 하는 역사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식민지 시대 이전 대부분의 판소리 소비자들은 관리들이었으며, 이들이 직접 기능을 익혀서 행하는 일은 없었다.
식민지 시대에 이르면 판소리는 각 지방 지주들의 사랑으로 파고들고, 또 여창의 일반화로 인하여 유흥화하게 된다.
여기에 봉건사회의 전통이었던 신분제도가 와해됨으로써 예술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게 됨에 따라, 소위 한량이라 하여 명문 출신 중에서도 기능을 익혀 고수로 나서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는데, 박홍규나 박창을과 같은 사람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박창을은 해방 직후 전주의 전동국악원에서 북을 가르치다가, 6·25 때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송영주에 의해 구출되었다. 6·25후에는 전주의 전동국악원에 머물면서 여러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송영주, 김판철, 송인섭, 주봉신 등이 이때 박창을로부터 배운 사람들이다.
한편 이때 김동준도 전동국악원에 있었으므로 김동준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박창을은 이기권으로부터 소리도 배워 그 수준도 꽤 높았다고 하는데, 그의 소리는 그다지 중요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박창을의 북가락과 이론은 송영주와 송인섭에게 가장 충실히 이어졌다. 특히 송영주는 이를 더 발전시켜 계승하고 있다.

송영주

송영주는 1920년 정읍군 태인면 오봉리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판소리를 좋아한데다 살림도 천여 석을 추수할 정도로 넉넉하여, 어려서부터 각종 음악을 접하면서 자랐다.
송영주가 북을 손에 대기 시작한 것은 7-8세 경이었다.
당시 송영주의 집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소리를 하던 전도성의 수행고수였던 전계문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계문은 어린 송영주에게 장단의 기초를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학교에 들어가게 된 송영주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북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송영주가 본격적인 북 수업을 한 것은 해방 이후 박창을을 만난 뒤였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방학 때가 되어 집에 들렀을 때나 그의 내당숙이던 권재남에게 북에 대한 이론을 듣는다거나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김제 출신 소리꾼이었던 박경천과 거문고를 타던 전득송으로부터 북을 배우기도 했으나 그것은 수업이라고 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전북 도청에 근무하게 된 송영주는 그때 전동국악원에서 북을 가르치던 박창을에게 북을 배우게 된다.
이때부터 송영주는 집중적인 수련에 임하였다고 한다. 6·25가 나자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던 박창을을 구해내 자신이 근무하던 임실경찰서에 두고 기거를 같이하게 되는데, 송영주는 이때 박창을의 가락을 완전하게 익혔다고 한다.
경찰 간부직을 그만둔 송영주는 제4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어 의정활동에도 종사한 바 있으며, 대한민국 국악협회 이사장도 역임한 바 있다.
송영주는 그 동안 각종 판소리 경연대회와 고수대회의 심사위원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으며, 전북대학교와 전주우석대학 국악과 강사로 출강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영주의 북에 대한 이론은 『소리와 장단』에 「고수론」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바 있으며, 그의 북가락은 1990년 신나라 레코드에서 낸 김성수의 「흥보가」에 기록된 바 있다.
송영주는 이 조사가 끝난 직후인 1992년 가을 별세하였다.

김판철

김판철은 1927년 정읍군 감곡면 방교리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께서 판소리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직접 북가락을 배운다든가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김판철은 정읍농고를 중퇴하고 경찰전문학교를 나와 1945년에 도경찰국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당시 명고수였던 박창을을 모셔다 학원을 차리고 다른 동료 선배들과 함께 북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학원이 바로 전주의 판소리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동국악원이다.
이때 같이 배운 사람들이 송영주, 송인섭 등이다.
박창을에게 북을 배우면서 판소리와 맺은 인연으로 김판철은 국악협회 전라북도 지부의 이사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20여 년 봉직하던 경찰을 퇴직한 뒤에는 예총 부지회장, 국악협회 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전주 대사습놀이 보존회의 발족과 대사습놀이의 복원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76년부터 1985년까지는 전주 대사습놀이 보존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86년부터 1991년까지는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아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현재도 실연자 연합회이사로 있다.

이처럼 김판철은 북을 배워 고수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국악과 관련된 행정과 조직의 일을 다년간에 걸쳐 수행하면서 국악계의 크고 작은 일들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김판철이 비록 뛰어난 고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정읍 지역의 민속 예능, 특히 판소리를 위시한 국악을 얘기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송인섭

송인섭은 1930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안 출신의 율객인 정경태로부터 시조와 가곡, 그리고 가사를 공부하여 18세 때는 전주에서 열린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2등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27세 때는 대구에서 열린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1등에 입상하였다.
송인섭이 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물 한 살 때인데, 당시 전동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박창을에게 북가락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북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88년에는 인간 문화재 김명환의 이수자가 되기도 했다.
1985년 제6회 전국 고수대회에서 명고부 장원에 입상하는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1986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전국 고수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국악협회 전북지부의 이사와 대사습놀이 보존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송인섭은 북으로 생계수단을 삼는 이른바 전업 고수는 아니다. 송인섭은 20여 년 간이나 동진노조에 근무한 바 있으며, 현재도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송인섭은 근본적으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아마추어 또한 아니다.
그는 박동진, 남해성, 오정숙, 성창순, 최승희 등의 발표회 때 북을 친 바 있으며, 최승희와 함께 수차에 걸쳐 해외공연도 가진 바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반 전업적인 고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송인섭은 박창을과 김명환에게 북을 배웠으나, 송인섭의 북가락은 박창을의 가락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명환에게 배운 때는 이미 송인섭 나름의 북이 완성된 이후였기 때문에 김명환의 가락은 별 영향을 끼친 것 같지 않다.
송인섭은 비록 김명환의 이수자이긴 하지만, 아직도 박창을의 충실한 계승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봉신

주봉신은 1934년 전북 완주군 조촌면 정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이 열여섯 되던 해에 이동백의 제자인 이만암에게 「흥보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판소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열아홉 되던 해에는 당시 김제군 부용면에서 살고 있던 이운학에게 1년 정도 「춘향가」를 배웠다. 이운학은 정정렬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이기권의 당질로서, 그 역시 이기권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이다. 스물 한 살 되던 해에는 김제군 백구면의 이수남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이수남은 판소리사에 별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조상선에게 판소리를 배워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주봉신은 이 무렵에 또 전주의 전동국악원에서 박창을에게 북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주봉신은 고수 수업을 하고 있던 사람이 아니고 소리를 공부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수업을 본격적인 것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수 주봉신이 고수 수업을 한 것은 이것이 또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군에 다녀온 주봉신은 3년여 동안 임방울을 따라다니다가 역시 임방울의 권유에 의해 군산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된다.
서른 세 살때에는 강경국악원으로 옮겨 그 곳에서 7년이나 버티다가, 판소리의 퇴조와 함께 밀려오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농악단을 조직해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 박동진을 만나게 되고, 고수로 전업하여 박동진의 전속고수가 되면서 주봉신은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로부터 16년 이상을 주봉신은 박동진의 북을 쳐왔기 때문에 이제는 주봉신 하면 박동진을, 박동진 하면 주봉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즉 주봉신은 박동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그는 박동진과 운명을 함께 해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봉신의 북은 편협되어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만큼 오래 대가와 함께 호흡을 맞춰온 사람도 없다.
현재 그는 우리나라 고수의 전통을 확실하게 이어갈 명고수임에 틀림없다.

이성근

이성근은 1936년 전북 정읍군 태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국악 애호가로 새납의 명인이었으며, 어머니가 국악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이성근은 어려서부터 국악을 가까이 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자신이 국악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이성근이 본격적으로 국악에 입문하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1955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살 길을 모색하면서 전주에 머물 때 전동군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거기에 이끌리어 그곳에서 소리 선생으로 있던 김동준에게 「심청가」 등을 배우게 된 것이다.

2 년여간 소리를 배운 이성근은 박녹주의 국극사를 시작으로, 여러 국극단과 여성국극단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박봉술로부터 「송판 적벽가」를 이수하였다.
지금도 이성근은 「적벽가」를 장기로 삼고 있다.
이 무렵 강도근을 찾아 「흥부가」를 배우기도 했으나, 끝을 맺지는 못하였다.
여성국극단이 운영난에 직면하여 해체의 길을 걷던 1960년대 이후 이성근은 익산, 신태인, 여수, 전주, 오수 등지의 국악원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6년 전주에 정착하게 된 이성근은 사설 국악원을 운영하다가, 1988년 10월 전라북도 도립국악단이 창단되자 창극단 수석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그 동안의 활동이 인정되어 국립창극단의 전속 고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국립창극단을 그만두고 다시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의 판소리와 북부의 강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92년 고법으로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이상 이성근의 이력으로 보면 이성근은 고수보다는 판소리 창자로서의 역할이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성근은 소리보다 북이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실제 활동도 고수로서의 활동이 더욱 돋보이는 바가 없지 않다.
1990년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고수대회에서는 신설된 대명고부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이성근의 고수로서의 역량은 이미 공적인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또 1990년 신나라 레코드에서 출판한 인간문화재 강도근의 「흥보가」와 「수궁가」의 고수를 맡음으로써 이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성근은 판소리로 출발했지만 고수로서 더욱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성근은 고수로서의 수업을 따로 받은 바가 없다.
그러나 정식으로 고수 수업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배우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판소리에는 북이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며, 소리를 배우거나 부르면서 보고 배우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학습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볼 경우 이성근은 김동준으로부터 주로 북가락을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성근은 김동준에게 장기간 판소리를 배웠는데, 김동준은 소리뿐 아니라 북도 잘 쳐서 나중에는 북으로 인간문화재까지 된 사람이다.
따라서 이성근의 북에는 김동준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다.
실제 이성근의 북 솜씨는 김동준을 빼다박았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여성국극단에서 장단을 담당하면서 무대 경험을 쌓아온 것 또한 이성근의 북에 커다란 득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읍 지역의 고법의 전통이 전업적인 고수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마추어 한량고수에 크게 의존했던 점에 비추어, 이성근은 정읍 지역의 고법의 전통과 간접적으로나마 인연이 닿는 전업적인 고수라는 점에서도 마땅히 그에 따르는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권재남

권재남은 1898년 정읍군 감곡면 유정리 출신으로, 송영주의 내 당숙이다.
권재남은 직업적인 고수는 아니었으나 음률을 좋아한 나머지 전계문에게 북을 배워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한학에 조예가 있었던 관계로 당시 정읍 지역의 북가락을 동양적 세계관으로 해석하여 송영주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권재남은 1960년에 별세하였다.

이상 정읍지역의 북가락의 전통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북가락 전통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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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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