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전계문

전계문은 1872년 정읍군 태인면에서 나서 1940년 사망했는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정읍의 풍류객이다.
전계문은 전도성의 당질이며, 전도성의 수행고수로 활동했는데, 춤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대금, 가야금, 거문고, 양금, 피리 등 모든 악기에 능통했다고 한다.
전계문은 허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풍류를 배웠다고 하는데, 허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전추산

추산(秋山)은 호이며, 본명은 용선(用先) 혹은 홍룡(洪龍), 홍년(洪年)으로 알려져 있다.
전추산의 호 '추산'은 본래 정읍의 옛지명을 따라 초산(楚山)이라고 하였으나, 해방 후에 추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출생년도에 대해서도 1879, 1884, 1887, 1890년 등으로 증언이 다양하며, 죽은 해는 1964년 혹은 1967년 등으로 전해오고 있다.
전추산은 정읍에 거처를 두고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나,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고창, 태인, 정읍 등으로 증언이 일정하지 않다.
전추산은 전계문과 같은 집안이라고 하고, 혹은 그의 조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전계문에게 사사한 다음 홀로 독공하여 단소, 대금, 통수, 피리, 가양금, 해금, 양금 등을 연주하게 되었다.
전추산은 거문고와 가야금 풍류를 익힌 뒤에 17세 경부터 단소를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추산은 단소를 특히 즐겨 불었으며, 단소에 관한 한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전추산의 단소는 귀신이 부는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전추산의 단소가락이 이미 신화적인 경지에 이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추산은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싫어하여 평생을 유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호남과 영남 일대에 수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그러나 전추산의 가락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은 많지 아니하여, 구례의 김무규(1907-1994)와 흥덕 후포 출신의 맹인 풍류객이었으며 퉁애의 대가였던 편재준이 그의 가락의 일부를 이었을 정도이다.
전추산은 1930년대 후반에 정읍의 대부호였던 김기남의 산정에 머물며 풍류를 하였는데, 이때 김용근, 신달룡, 이기열, 나용주 등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했으며, 몇몇 제자를 양성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주로 전주에 머물렀는데,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여 여기저기 떠돌며 잠은 주로 승암사에서 잤다.
죽기 직전에도 승암사에 자러 올라가다가 슬픔에 복받쳐 단소를 불다 쓰러져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전추산은 단소 산조를 만들었으나, 전추산 스스로 산조보다 정읍에 더 공을 쌓았다고 할 정도로 풍류를 중시하고 또 즐겨 연주하였는데, 그의 풍류 가락은 산조보다 더 감동을 주었다고 전한다.
전추산은 1960년 10월 6일 국립국악원 국악진흥회에서 주는 국악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전추산의 연주 녹음은 3-4개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보고 되었다.

편재준

편재준은 엄밀히 말하면 정읍의 율객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추산의 제자로서 이 지역에서는 최고 가는 율객이었기 때문에 언급하기로 한다.
편재준은 1890년 고창 흥덕 후포에서 태어났다.
세 살때 눈이 멀어 평생을 장님으로 살았다.
후포는 조깃배가 들던 포구로 6.25무렵까지는 매우 융성하였기 때문에 협률사 공연도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전추산이 조기 파시를 당하여 후포에서 협률사 공연을 할 때였다.
나이 어린 맹인 하나가 날마다 와서 전추산의 연주를 듣는 것이었다.
전추산이 지나가는 말로 '저런 사람이 단소를 불면 잘 할 수 있을 텐데'하고 지나가자, 그 맹인은 전추산에게 자기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전추산은 그에게 단소 하나를 주면서 한번 불어보라고 하고는 후포를 떠났다.
다음 해 파시 때 다시 와 보니, 그 맹인이 얼마나 단소를 불었던지 단소가 다 깨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전추산이 그 소리를 들어보니 어느 정도 길이 잡혔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편재준은 전추산으로부터 풍류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편재준은 후에 단소보다도 퉁애를 불어, 퉁애의 최고 명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편재준은 퉁애의 명인이었으나 맹인이었기 때문에 한 평생 가난한 가운데 곤궁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제자 김환철의 증언에 의하면, 후포에 살던 담양의 대부호 국참봉의 후실의 아편 심부름을 하다가 자신도 아편 중독이 되어 말년에는 거의 폐인이 되었었다고 한다.
편재준은 흥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고창과 정읍을 내왕하며 지냈는데, 전라북도 대금정악무형문화재였던 김환철을 제자로 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연주 녹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편재준 음악의 실제 모습은 확인 할 길이 없다.

김용근

김용근은 1985년 태인 출신이며, 1963년에 죽었다. 김경남에게 거문고를 배웠으며, 정읍과 고창 지역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정경태, 황상규, 이기열, 원광호 등 많은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용근은 전계문에게만 배웠다는 것이다.
실제 김용근과 전계문이 같은 태인에 살았던 점에 비추어 이 증언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 지역 사람에게 배우는 것보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추측일 뿐이며, 사실 여부는 더 상세한 조사를 요한다.

김용근은 특히 흥덕 아양율계와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어서, 아양율계의 춘추회에는 늘 참여하였다고 한다.
김용근은 초산율계의 창립 계원으로 초대 계장이 되었는데, 아양율계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경험이 초산율계의 창립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은희상

은희상은 정읍 고부출신으로 오래 동안 정읍 예기조합의 조합장을 지내면서 정읍지역의 판소리 발전에 공헌을 하였다.
김용근, 김홍진에게 양금을 배워 양금을 잘 탔다고 한다.
정확한 생존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대개 1892년 경에 나서 1960년 경에 작고한 것으로 보인다.

박홍규

박홍규는 명고수로 오래 동안 정읍 예기조합과 국악원에서 총무를 맡아 실무를 총괄했던 사람이다.
풍류보다는 판소리와 고법에 있어서 공헌이 지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흥덕 아양율계의 춘추회에는 초청을 받아 늘 참여하였으며,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으로 초산율계의 창립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을 보면 풍류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홍규는 율계에서 장구를 맡았다고 한다.

김윤덕

김윤덕은 1916년 정읍군 입암면 신금리에서 태어났다.
김용근에게 거문고 풍류를, 정남희에게 가야금 산조를,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정읍에서 초산율계에 참여하여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탔고, 후에 서울에 올라가서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68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윤덕의 가야금 산조는 정남희의 것을 이었으면서도, 오랜 풍류활동의 영향과 자신이 많이 짜넣은 더늠으로 인하여 정남희의 신조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김윤덕의 산조는 평조 선율이 많고 꿋꿋한 느낌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윤덕은 후에 산조의 대가가 되었지만, 그 산조의 밑바탕에는 풍류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윤덕은 1978년에 작고하였는데, 이영희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정경태

정경태는 1916년 생으로, 전북 부안군 주산면 토산에서 태어났다.
부안 출신이지만 부안의 풍류회가 활발히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읍과 고창에서 많이 활동했다.
특히 초산율계에서는 창립계원으로 참여하는 등 중추적인 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경태는 전계문으로부터 시조와 가사를 배웠으며, 이병성에게 가곡과 가사를 배웠고, 임석윤에게 가곡반주, 김용근에게 거문고 풍류, 신달룡에게 젓대를 배웠다.
부안의 부풍률회와 정읍의 초산율계에서 거문고를 주로 탔는데, 후에 전국의 시조를 연구하여 석암제(石菴制-석암은 정경태의 호임) 시조를 창시하였다.
대한시우회(大韓詩友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7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시조, 가곡, 가사의 명창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풍류객으로서 그가 정읍과 고창 지방에 끼친 영향과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달룡

신달룡은 1915년 정읍군 북면에서 태어났다.
전계문에게 대금 가곡과 풍류를 배웠으며, 전추산에게 대금산조를 배워 풍류와 산조를 잘했다고 한다.
신달룡은 명고수 김동준의 장인이기도 한데, 고창과 정읍의 풍류회에 참여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초산율계에는 창립계원으로 참여하는 등 중추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신달룡은 1959년 작고하였다.

나금철

나금철은 1907년 김제군 봉남면 종덕리에서 태어났다.
전추산에게 가야금과 양금 풍류를 배웠으며, 정경태에게 양금 가곡을 배웠다.
나금철은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이며, 이상백, 이기열 등의 제자를 두었다.

유종구

유종구는 1920년 정읍 출신으로 정경태에게 남녀 가곡창과 가사를 배웠고, 송창섭에게는 여창 가곡을 배웠다.
전추산으로부터 단소를 배워 초산율계에서는 단소를 불었다고 한다.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이며 시조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후에 대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살다가 작고하였다.

김홍진

김홍진은 1910년 고창 무장 출신으로 정읍 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었는데, 전추산에게 양금과 거문고를 배워 탔다고 한다.
김홍진은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이었다. 김홍진은 자신이 연주하는 풍류를 정간보로 기록한 악보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정읍 풍류의 전통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용주

나용주는 1923년 정읍 소성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정경태로부터 시조, 가곡, 가사를 배웠고, 김홍진에게 양금을, 김용근으로부터는 거문고를 배워 잘 탔다고 한다.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이다.

송기동

송기동은 1910년 김제군 봉남면 종덕리에서 났으며, 후에 정읍군 감곡면 유정리에서 살았다.
나금철에게 양금 풍류와 가곡 반주를 배워 최근까지 초산율계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현재는 고령으로 활동을 못하고 있다.

김환철

김환철은 1910년 정읍군 소성면 만수리, 현재의 고부면에서 한약방을 하던 김형준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으나, 11세 때 부친이 별세한 후에는 어려워졌다고 한다.

김환철이 본격적으로 풍류를 익히게 된 것은 흥덕의 양조장에 근무하면서 편재준에게 5년여에 걸친 학습을 통해서였다.
편재준에게 풍류를 익힌 김환철은 성내6·2계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또 전주로 이사하여 학원을 경영하면서 완산풍류율계에 참가하였고, 전추산을 다시 만나 풍류를 재수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정읍의 초산율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91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계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경에 정읍으로 이사하여 작고하기까지 정읍에서 살며 이리 정악원까지 나가 풍류를 하기도 하였다.

1984년 전라북도 대금 정악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김영수와 김문선 두 이수자를 두었다.
김환철은 정읍 풍류의 2세대로서 정읍 풍류를 대표하는 명인이었으나, 이 조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작고하여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환철은 다행히 이수자를 두었기 때문에 정읍 풍류의 대금 전통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상백

이상백은 1910년 고부면 만화에서 출생하였다. 6.25직후 정읍으로 이사하여 줄곧 정읍에서 살고 있다.
처음에는 송만갑의 제자인 고부 출신 송운용에게 〔흥보가〕를 배웠으며, 후에 은희상, 박득봉과 함께 나금철에게 풍류 가야금과 양금을 배워 초산율계에도 자주 참여하였다.
이상백은 현재도 그의 부인 유영숙과 함께 초산율계에 자주 나와서 양금을 타고 있다.

이기열

이기열은 1919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정읍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읍과 군산의 교육청에 오래 근무하게 되었는데, 6.25 직후 김기남의 아양정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음악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된다.

1953년 신관용으로부터 가야금 산조와 풍류를 사사받은 것을 시발로 해서 이기열은 음악수업을 시작했다. 1955년부터 5년여 동안 정경태로부터 가곡, 가사, 시조를 사사받았다.
1957년에는 김용근에게 거문고 풍류를 배웠다. 1958년에는 나금철과 김홍진으로부터 양금을 배웠으며, 이때의 음악수업은 이기열로 하여금 초산율계의 창립계원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초산율계의 창립 이후 이기열은 여러 차례에 걸쳐 유사와 계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초산율계를 이끌었다.
특히 1969년 초산율계가 일단 해체된 후에, 고부출신 은재표와 함께 현 정읍국악원을 건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정읍정악원의 건축은 다시 초산율계의 재발족으로 이어져 오랜 정읍 풍류를 계승·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기열은 1987년 향제 줄풍류 이수자가 되었으며, 1988년 향제줄풍류 전수 조교를 거쳐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현재 그의 문화재 후보는 구례 줄풍류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향제 줄풍류 문화재가 구례의 김무규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김무규는 전추산의 단소를 배워 그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구례 풍류는 지역적으로는 구례 지방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음악적 전통은 정읍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기열은 비록 구례 줄풍류의 전수자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정읍 풍류의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문화재 후보 지정은 정읍 향제 풍류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문선

김문선은 1956년 정주시 쌍암동에서 출생하였다. 국제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정읍 호남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김문선이 정읍 풍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정읍 고부여중 교사로 근무를 시작한 뒤 대금 정악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김환철을 만나면서부터이다.
김문선은 김환철에게 대금 풍류를 배워 1986년 초산율계에 입회하였으며, 현재 대금 정악 전북 무형문화재 김환철의 이수자이다.
김문선은 정읍 풍류를 보존·계승하기 위하여 4-5년 전부터 정주 시내에서 단소 강습회 등을 열다가, 1990년 샘깊은소리회를 결성하여 매주 두 차례씩 모임을 갖는 등 정읍 풍류의 계승·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는 본래 대금을 익혔으나, 샘깊은소리회를 운영하기 위하여 가야금, 해금, 거문고, 장구, 단소까지 익히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정읍 풍류의 장래는 김문선에 의해 매우 희망적인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영수

김영수는 1954년 생으로 현재 정읍 배영중학교 음악교사이다.
김영수는 전라북도 대금 정악 무형문화재 김환철의 이수자로서, 초산율계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상 정읍 풍류의 인물들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정읍 풍류 인물 도표

정읍 풍류 인물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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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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