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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손병희

천도교 창건, 삼일운동의 주역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손병희, 그는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우뚝한 민족지도자였고 천도교를 창건한 민족종교의 교조였고 3·1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여러 가지 논란이 따르고 있다. 그의 종교적 행적과 개인의 생활 태도를 두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탓이다.

3·1운동이 있기 며칠 전날, 「독립선언문」과 「공약삼장」을 보성학원 내 보성사(普成社) 인쇄소에서 은밀하게 찍고 있었다. 이 일에 사장인 이종일(李鍾一)과 담당기술자 그리고 사동 등 세 사람만이 참여하여 밤에 커튼을 드리우고 극비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귀를 기울이니 고함소리는 빗발쳤다. 바로 종로서의 악질형사 신승희(申勝熙)의 목소리였다.

일단 문을 열어준 이종일은 공포와 분노로 오금이 저려 왔다. 이종일은 두 손을 모아 잡고 그에게 읍소(泣訴)하였다. 이것만은 눈감아 달라고. 그리고 손병희 선생에게 함께 가자고 그의 소매를 끌었다. 그의 입에서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는 부드러운 대답이 나왔다. 이종일은 단숨에 손병희의 거처로 달려갔고 자초지종을 들은 손병희는 안방에서 서슴없이 돈뭉치를 꺼내주었다. 신승희는 이 돈뭉치 5천원을 받고 유유히 사라졌으며, 「독립선언문」과 「공약삼장」 2만 1천장은 경운동 천도교당의 창고에 무사히 보관되었다.

이때 요긴하게 쓰인 돈 5천원은 말할 것도 없이 천도교측 자금이었는데, 당시 3·1운동을 앞두고 천도교에서는 기독교의 이승훈에게 5천원,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 3만원, 만주의 독립활동자금으로 6만원 등이 지출되었다. 당시 천도교측은 경운동 대지매입과 교당신축으로 재정이 궁한 상태에 있었고 더욱이 일제는 교당 건축 같은 일에 기부금을 모집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막고 있었던 처지였다.

아무튼 3·1운동으로 천도교측은 막대한 빚을 졌고 이를 계기로 산하에 있던 교육기관을 넘겨주어야 했다. 물론 이것은 민족독립을 위한 천도교단의 희생이었고 이 일을 손병희가 주동이 되어 과감히 추진했던 것이다. 손병희에게도 여러 가지 포폄(褒貶)이 따르기는 하나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것만으로 민족사에 빛나는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한미한 신분- 아전의 서자
첫째 단계는 그가 태어나서 동학에 입도하기까지일 것이다. 그는 청주 아전의 서자로 태어났다. 신분사회에서 그는 이중의 굴레를 쓰고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이 재산이 없어서 어릴 적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곰같은 듬직한 체구와 호랑이상을 한 용모를 지닌 청년으로 협기가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적에 전해지는 두 가지 이야기는 그의 인생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어린 응구(應九; 아명)를 불렀으나 그는 못들은 척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왜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둡니까? 이제부터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없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죽어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에서만은 적서를 차별하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관습으로나 법제로는 적서차별이 철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의 고향 대주리(大周里) 뒷산 망월산에서는 손씨들의 시제가 있었다. 이해 장가를 든 손병희는 관례에 따라 이 시제에 참례하려 제사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서손이라고 하여 묘제 참석을 금하였다. 이에 그는 말없이 마을로 내려와서 삽을 들고 다시 올라와 묘를 파기 시작했다. 이를 본 종중 인사들이 야단을 떨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서자라 해도 조상은 같은 조상입니다. 서자는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절마저 할 수 없다하니 부득이 나는 조상의 배라도 나누어서 따로 산소를 모시고 참배해야겠소” 종중 인사들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로 해서 그는 기어코 참배하고 말았다 한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그가 스스로 가정과 가문에서나마 적서차별을 깨부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런 성격 탓으로 때로는 무뢰배의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의협의 기질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2세 때인 1882년 동학에 입도했다. 적서차별을 철폐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동학에 그가 입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동학지도자로 재건을 위해 헌신
그가 동학에 입도한 뒤에는 근신하면서 양반의 능욕과 같은 행동보다는 조용히 기도하고 포덕(布德)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수도자의 길을 걸으며 동학의 가르침인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이념을 탐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동학 교도들 사이에서 남다른 신망을 얻었다. 더욱이 교주 해월 최시형의 고제가 되고 의암(義庵)이라는 도호를 받고난 뒤인 1890년대에 들어서는 그의 조카인 손천민과 김연국과 함께 동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될 적인 1893년경에는 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보은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적에 동학 내부에서는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운동이 그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손병희도 여기에 적극 동조하였다. 이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적에 북접의 미온적인 태도를 누르고 북접의 통령으로 추대되어 전봉준과 손을 잡고 반봉건 반침략의 항쟁에 나섰다. 공주전투는 전봉준이 주도했으나 그도 엄연히 북접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것이다.

공주전투 패전 후 그는 전봉준과 함께 원평과 태인전투에 참여했고 마지막 태인에서 전봉준과 헤어진 뒤 최시형과 함께 북상해서 영동 보은 일대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그런 뒤 최시형을 모시고 경상도 강원도로 숨어 다녔다.

1897년 최시형은 동학의 도통을 그에게 전수하였는데 이때부터 그의 제3의 생애가 전개된다.(김연국에게 도통전수를 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듬해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되고 난 뒤 손병희는 동학 재건에 헌신하는 한편 세계정세에 눈을 돌려 대외인식에도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특히 국사범으로 지명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고 이어 미국에 가기 위해 상하이에 가기도 한다.

손병희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의 신문물을 살펴보았고 또 그곳 정객들과 망명객인 오세창, 박영효, 이용구 등과 어울렸다. 이때 그는 신문물을 수용한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종교운동에서 정치개혁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회(進步會)로 하여금 러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에 협조케 하고 러일전쟁이 진행될 적에 군자금 1만원을 제공하기도 하고 철도부설에 협조케 하였다. 이때에는 일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모습이다.

러일전쟁에 조선은 중립을 선언하고 내용으로는 일제에 협조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대일교섭을 벌이고 정치조직 진보회를 동원하여 폐정개혁(弊政改革)을 단행하려는 구상이었다(『의암손병희선생전기』 참고). 그러나 이런 구상은 전혀 일제의 조선침략 의도를 모른 것이었다. 오히려 러일전쟁 뒤 일본이 외교권을 접수하는 ‘을사조약’이 강요되었고 진보회는 일진회로 개칭되어 친일부역에 앞장섰던 것이다.

동학의 일부 교도 곧 이용구 등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반침략 노선에 참여했으나 진보회-일진회를 거치면서 친일부역의 길을 걸었다. 이런 속에서 손병희에게도 석연치 않은 행동과 불철저한 지도노선이라는 비난이 따랐다. 뒷날 이를 혁신운동이라고 부르나 혼란을 유발했다는 지적도 있다.

3․1운동의 중심 지도자
을사조약이 맺어진 뒤인 1905년 일본에서 그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어 귀국해서는 일진회를 축출하는 운동을 벌여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이용구 등의 간부를 축출하였다. 그런 뒤에도 천도교를 친일집단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를 친일파 두목으로 지목해 테러를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기를 느낀 손병희는 천도교 조직을 김연국에게 일단 물려주고 나서 천도교에서는 막후에 물러났으나 보성사를 설립하여 출판운동을 벌이고 보성학원(소․중․전문학교), 동덕여학교의 설립과 경영을 통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뒷날 이런 사업들은 천도교가 신문잡지를 통한 언론운동, 야학 등 계몽을 통한 대중교육운동, 그리고 어린이운동, 여성운동, 청년․농민운동을 줄기차게 벌이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어쨌든 이 마지막 시기에 들어, 그는 천도교 교주로 복귀해 교도들에게 1919년 1월부터 49일의 기도회를 갖게 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에 두게 하였다. 일단 미국 등이 1차 세계대전 뒤 주창한 민족자결원칙에 동조하면서 민족내부의 역량집결에 주력하였다. 그리하며 3·1운동을 준비하면서 구한말 고관귀족의 포섭을 도모하였고 종교인, 언론인, 학생, 지식인의 통일전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계 인사로 민족대표가 구성되었고 민족대표들이 타협적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적어도 식민지가 된 이후 10년 사이 인재 양성과 역량축적을 이룩한 결과, 끝내 이를 계기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이후 이루어진 세계 식민지국가에서 가장 격렬하며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도 끼친 3·1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3·1운동을 천도교나 손병희만이 벌인 것은 아니나 천도교가 그 중심이 되고 손병희가 그 주역이었던 것만은 우리가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3·1운동 이후 천도교가 가장 큰 탄압을 받았던 것이요, 또 손병희는 그 주동자로 3년 형을 받고 복역 중 뇌출혈을 일으켜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민족운동의 영도자
손병희의 행적을 두고 종교적, 정치적, 사회교육적으로 나누어 평가한다. 그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여 인간중심의 고유종교를 신중심의 서구종교로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는다. 또 정치운동에서 때로는 설익은 정세판단으로 일제침략에 방조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한편 사회교육운동에서는 신분의식의 타파와 여권의 신장과 어린이와 청년의 교육 등 빛나는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격에는 남다른 의협심과 인간애가 넘치는 대신에 낭비를 일삼고 호화와 사치에 젖었다는 꾸지람도 따른다.

아무튼 이런 포폄(褒貶)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기 우리의 국내민족운동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영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때로는 폭력주의, 때로는 개혁주의, 때로는 비타협주의를 적절히 구사했던 것이다. 손병희는 일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 나타난 우뚝한 지도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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