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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BRAND|백정기의사|백정기는누구인가?

백정기는누구인가?

역사속의 백정기

의사는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난 2년 후인 1896년 태어난다. 을미사변에 분노한 의병들이 각처에서 일어나고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나 나라의 앞날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다. 의사가 결혼한 후에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었고 고을 일대의 부자였던 처가가 일제에게 수탈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의사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28세 때인 1923년에는 일왕을 암살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관동조선인학살 사건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친다.

193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한족총엽합회에 참여했으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동지들과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선다.

의사는 찬연한 의열투쟁끝에 일본의 감옥에서 조국 광복을 10여 년 앞둔 1934년에 순국한다.

구파백정기의사 활동

구파백정기의사 활동을 날짜별로 나타낸 표입니다.
일 시 내 용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新雲里)(前東津面 下長) 백남일(白南一)
(字 士順)과 파평윤옥문(坡坪尹玉文)의 장남으로 음력 1월 19일 출생하다.
1906년(11세) 부안군 南下面 內辰里로 이거하다.
1908년(13세) 정읍군 永元面 鶯城里 조병열매(曺秉烈妹) 조팔락(曺八洛)과 결혼하다.
1911년(16세) 부친별세하고 정읍군 영원면 隱仙里 曷山마을로 이거하다.
1919년(24세) 1) 2월에 강토를 강점당하고 왜정하에서 신음하는 설음을 설진하고저 무력투쟁을 통하여 결사구국할 것을 결심하다. 이때 전국에서는 민족봉기의 기운이 성숙하자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였다.
2)8월에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동분서주하는 중 본계획이 누설되어 일시 奉天으로 피신하다.
1920년(25세) 서울로 잠입하여 재기를 꾀하던차에 당시 本町 경찰서(中部署)에 피검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방면되다.
1922년(27세) 왜정의 탄압으로 부득이 奉天을 떠나 北京으로 망명하여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전선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923년(28세) 일본에 밀입국하여 東京부근 하야가와(早川)수력공사장에 은신하며 日王 암살을 기도하던중 동경 대지진으로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다.
1924년(29세) 1) 북경에서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정화암 등과 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고 동지들과 주간지 “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2) 11월에 上海로 가서 영국인 철공장에서 일하면서 폭탄 제조기술을 익히며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 지도하였다.
1925년(30세) 상해에서 5월 30일 총파업이 단행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화남연맹)들과 수만의 노동자를 동원 총파업을 지휘하였다.
1927년(32세) 이을규, 이정규와 푸젠성 취안저우(복건성 천주시)에 민남25현 민단편련처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의 自治自衛운동을 韓,中,日 삼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다.
1928년(33세) 5월 남경에서 朝,日,中,比,印,安南 등 제국대표로 조직된 東方無政府主義者 연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하고 동연맹기관지 “東方”편집위원이 되었다.
1930년(35세) 10월말 북만주 吉林省 해림으로 가서 그곳 在滿同志 김종진, 김야운 등과 같이 김좌진, 이을규 등 동지들이 조직한 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在滿同胞의 조직강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다.
1931년(36세) 1) 5월 病 치료차 상해로 돌아와 몸을 요양하는 한편 영국인 戰車會社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하다.
2) 9월 만주사변 촉발을 계기로 이회영, 유자명 등과 협의하여 남화 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단체로서 남화구락부를 두어 기관지“남화통신”을 발간하다.
3) 10월말 중국인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韓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다.
1932년(37세) 12월 일본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天津港에 입항한 11,000톤급 日淸船에 폭탄을 던져 선체일부를 파괴하고 이여산과 함께 천진 일본 총영사관 관저에도 폭탄을 던지다.
1933년(38세) 이강훈, 원심창, 정화암, 오세민과 함께 왜적이 중국 군관을 매수하고자 駐中 日公使 有吉明과 왜군요인 중국정부친일거두들이 상해 武昌路 六三亭에서의 밀회를 탐지하고 同會議場을 격파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순간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日本長崎 법원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파고 복역하게 되다.
1934년 6월 5일
(39세)
甲戌年 陰4월24일 陽6월5일 오후 11시 옥중에서 39세를 一期로 逝去하였다.
1946년 7월 6일 丙戌년 7월 6일 國民葬으로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효창원 묘역에 안치되시다.
1963년 3월 1일 정부에서 大韓民國 建國功勞勳章 獨立章을 추서하였다.
1997년 4월 의열사 기공
2004년 6월 5일 구파 백정기의사 순국 60주기 추모행사겸 의열사 준공 및 영정봉안제를 올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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