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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전통문화|풍류|단체|초산율계(楚山律契)

초산율계(楚山律契)

초산율계는 정읍의 풍류를 대표하는 율계이다.
아양계가 고창의 성내나 흥덕의 율계에 비해 존속기간이 짧았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활동을 보였기 때문에 두드러지지 못했다면, 초산율계는 다른 지역의 율계가 해체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 시작되었으면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임으로써 정읍을 풍류의 고장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초산율계의 초산은 정읍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초산율계 계금부(契金簿)에 의하면, 초산율계는 1954년 갑오년 9월 18일에 조직되었다.
창립회원은 김용근, 김영관, 박홍규, 김진술, 박주양, 나금철, 김홍진, 정경태, 이기열, 유종구, 나용주였으며, 회장은 김용근이었고, 유사는 유종구였다. 초산율계는 한 해에 봄과 가을 두 차례의 큰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 때의 지출내역은 계금부에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걷어 경비로 충당하고, 남는 돈은 식리(殖利)를 하여 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때로 희사금을 받은 적도 있으나 회수나 금액이 별로 많지는 않아서 재정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또 회비 지출내역을 보면, 매번 화대(花代)가 들어 있어서 고급 요정에서 모임을 가진 것이 확실하다.
회원의 경사에 부조한 기록은 없으나, 회원의 상사(喪事)에는 부조한 기록이 몇 차례 보이는 바, 1957년에 박홍규가 사망을 당하여 삼만육천 환을 부조한 것과, 1959년 가을에 신달료가 사망을 당하여 오천 환을 부조한 것, 그리고 1963년 가을에 회장 김용근이 사망을 당하여 일천오십 원을 지출한 것 등이 중요한 내용이다.
이 기록에 의하여 이 세 사람의 사망 연대가 정확하게 확인될 수 있었다.

봄과 가을에 열리는 모임에서 입회비를 내고 신입회원의 입회를 받았는데, 중요한 기록을 보면, 1955년 3월에 임기하, 은회상, 진상돈, 황면주, 박득봉이 입회하였고, 1955년 가을에 송기동과 정상연이 입회하였으며, 1956년 가을에는 이귀남, 김동문, 차인환, 홍순옥이 입회하였다.
그리고 1957년에는 황상규가 새로 입회하였고, 1959년에는 허현이 입회하였으며, 1962년 가을에 김환철이 입회하였다.
계금부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초산율계에 참가한 것이 확실한 사람으로는 김윤덕을 들 수 있다.

초산율계는 성내의 6·2계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성내 6·2계는 옛 3·9회의 회원들이 주동이 되어 1961년 3월 15일에 조직되었다.
회장은 황하영, 부회장은 황오익이 맡았으며, 회원은 황화익, 김정의, 이병구, 황재문, 김환문, 김환철, 한량수, 이연택, 이영문, 김광호 등이었다.
그후 1980년에는 이병구가 회장이 되고, 황욱, 전용일이 새로 입회하여 현재까지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초산율계는 1966년 가을 이후에는 사실상 모임을 갖지않은 듯하다.
초산율계 계금부에는 1969년까지 기록이 있으나, 1967년부터는 율회와 관련된 지출사항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때는 일반 친목회와 같은 실정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초산율계는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1960년대 초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초산율계는 1971년에 정읍정악원이 조직되고 현재의 위치에 건물을 마련한 뒤 정읍정악원과 통합하여 율회를 계속하였다.
그 모임이 1978년 초산율계의 재발족으로 이어지면서 맥을 이어왔다.
1978년 재발족 당시의 임원들로는 계장이 이영신, 부계장에 김환철과 송기동, 총무에 이상백, 감사에 김용일과 이기열이 있었다.
그리고 임원을 포함한 계원은 총 16명이었다.
초산율계는 1980년대 후반에 김영수, 김문선 등 젊은 교사들의 잇단 입회로 인하여 원로회원이 5-6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원 총수가 26명에 이르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연주 기량이 제대로 성숙되지 못하여 전성기의 실력과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초기의 초산율계는 음악적으로는 전추산에게 크게 의존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인사가 전추산의 제자이거나 전추산의 제자로부터 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구체적인 사제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당대 풍류의 최고 명인이었고 정읍에서 살았던 전추산의 영향을 빼고 초산율계를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산율계는 우리나라의 국악이 전반적으로 회복불능에 가까운 침체의 길에 들어 선 이후에도, 지리멸렬해진 인근 율계들의 활동을 포괄하면서 향제 풍류의 전통을 지속시키고 있는 귀중한 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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