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유래

태인면은 유교문화가 흥성했던 곳으로 그 연원은 신라 말엽 헌강왕(875∼885년)때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인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를 역임한 데서 비롯한다.

태산군은 본래 백제의 太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太山으로 고쳤다(太는 泰로도 통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불우헌 정극인이 향학당을 설치하였고 현감 영천 신잠이 사학(四學)을 설립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그리고 1696년(조선 숙종 22년) 태인 피향정을 국고로 중건하였으니 모두 최치원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업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교문화의 흥성을 이루었다. 태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시대 太尸山郡으로서 그 고을터가 현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다고 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태산군이라 일컫고 정읍·인의현 등 이웃 고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영주(고부) 관찰사의 속현이 되었다가 태산현인(泰山賢人)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몽고에 들어가 활동하다 1354년(공민왕 3년) 고려에 원병을 청하는 원나라의 사신으로 본국인 고려에 돌아오자 그 공으로 태산현을 군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또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현(또는 부성)으로 그 고을터가 현 태인면 백산리에 있었던 자그마한 고을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무성이라 개칭하여 태인군의 영현(嶺縣)이 되었으며 936년에는(고려 태조 19년) 인의현이라 일컫고 영주(고부) 관찰사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산현감이 겸임하게 되어 인의현민들이 동쪽에 떨어져 있는 태산읍(칠보)에 왕래하기가 불편하여 1409년(조선 태종 9년) 두 고을을 합하여 비로소 태인이라 일컫게 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8월 현감 황경돈이 고을터를 중간지점인 거산연(현 태인면 거산리)으로 옮겼으나 터가 좁아서 1418년(태종 18년) 현감 오치선이 거산리에서 다시 현재의 위치인 태인초등학교로 옮기고 1419년 현아 건물을 세웠으며, 1421년(세종 3년)에는 현감 안기가 향교성전을 세웠다.

태인현 구역 변천 상황을 보면, 서촌면·남재이변면이 보림면, 군내면·인곡면·흥천면이 태인면으로 되었다가 다시 보림면과 합쳐서 태인면이 되었으며, 용산면·북촌면이 용북면→신태인면→신태인읍이 되었다. 옹지면·동촌면이 옹동면으로, 고현내면·남촌일변면이 칠보면으로, 산내일변면·산내이변면이 산내면으로, 산외일변면·산외이변면이 산외면이 되었다.

연혁

  • 백제시대 대시산군
  • 신라시대 태산군
  • 고려시대 인의현
  • 조선시대 태인현
  • 고종34년 태인군
  • 1914. 3 군내, 인곡, 홍천면을 태인면으로 통합
  • 1935. 4 태서, 매계, 태남, 오류리 편입
  • 1983. 3 백산리(6개 마을) 신태인읍 편입
  • 1990. 4 오류리 원오류가 북면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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