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원래 정읍현(井邑縣) 군내면(郡內面)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정읍군 정읍면 연지리 (井邑面 蓮池里)가 되어 분리(分里)는 연지리(蓮池里), 죽지리(竹支里), 서외리 (西外里)일부로 편성 되었는데 1931년 4월 1일 읍(邑) 승격으로 분리(分里)의 구역이 연지(蓮池), 서연지(西蓮池), 죽림(竹林), 미창(米倉), 명덕(明德)동으로 나누어 졌다. 『蓮池』의 동명은 옛날 이곳에 연못(蓮池)이 있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지동(蓮池洞)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高麗)이후 이곳에는 연지원 (蓮池院, 혹 迎支院)이 있어 교통에 이용되어 왔다. 1914년 호남선 철도개통에 정읍역(驛)이 들어서게 되니 1천년 동안 교통의 요지로 이어온 셈이다.

마을의 유래
연지(蓮池)
  •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정읍군 군내면 연지리(蓮池里)로, 1914년에는 정읍군 정읍면의 죽지리(竹支里), 서외리(西外里) 일부를 포함하여 연지리(蓮池里)로 편제되어 있다. 연지교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도의 동편을 지칭한다. 옛날 연지원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의 명칭은 영지원(迎支院)이다. 『동국여지승람』정읍현조(井邑縣條)와 『대동지지』정읍조에 영지원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연지교 안쪽을 말한다. 이 마을에는 조기찬씨가 소유하고 있는 '부무실'(富武室, 행서체)이라 씌어 있는 현판 글씨가 있는데, 창암 이삼만이 쓴 글씨라고 구전되고 있다. 지금은 후손인 조대경(趙大慶, 전주 거주)씨가 보관하고 있다. 풍수설로는 연지리의 지형이 연화도수(蓮花倒水) 형국이라고 한다. 연지교에서 잔다리목 사거리까지의 도로를 이 명칭을 따서 연지로라 칭한다.
죽림(竹林)
  • 속칭 '대실'이라 하며 죽림교 건너의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죽지곡리(竹支谷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죽지곡은 대실의 한자 표기이다. 대한제국시대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도 죽지리(竹支里)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정읍현조에 홍경손이 고을의 경관을 읊은 「제영(題詠)」이라는 시에 '蒼松綠竹滿前山  吹徹骨寒 洪敬孫'이라 되어 있다. 이것을 풀이하면 '푸른 솔 푸른 대는 앞산에 가득하고 솔솔부는 서늘한 바람은 온 몸에 스며 차다'라는 뜻이다. 즉, 대나무가 많아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나무숲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볼 때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고려 때 정읍현의 고을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정읍현의 읍지가 초산을 중심으로 이동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미창(米倉)
  • 미창마을은 원래 피난민들의 빈민촌으로 형성된 지역으로 6·25전쟁을 전후해서 피난민들이 입주하면서 가구수가 증가했다. 일제 때 일본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 고창(高敞), 부안(扶安) 등지에서 실어 오는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창고 일부는 개인 땅이고 일부는 시유지로 되어 있다. '오까베'식으로 지어졌다는 이 건물은 먼저 판자를 대고 한쪽은 종이로 되어 있으며 한쪽은 콜타르가 칠해진 일명 '루핑'이라는 것을 양쪽에 댄 다음 철사망을 치고 시멘트를 바른 공법으로 단열이 우수한 이점이 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정읍군 관내 면지역의 추곡수매가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역전 동쪽에는 역시 일제 때 지어진 정읍도정공장(井邑搗精工場)이 있었으나 수년전 수성동으로 이전하였고, 현재 이곳은 4차선 도로인 서부산업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옛 창고자리에는 정읍농협 하나로마트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 공장과 함께 일제 때 지어진 건물로는 정읍 우체국과 구시장, 정읍경찰서장 관사 및 과장관사, 소방서 수성파출소 등이다. 그 중 우체국과 구시장 건물은 헐리고 나머지는 현재 관공서로 사용되고 있다.
명덕(明德)
  • 잔다리목 오른쪽 마을로 1930년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앙극장 맞은편 산 밑의 소로를 따라가면 정읍 북초등학교로 이어지는데, 도로를 중심으로 산 밑의 마을이 선은으로 수성동(水城洞)에 속하고 아랫마을이 명덕으로 연지동(蓮池洞)에 속한다.
    ※ 참고「 내고장 역사의 숨결의 찾아서 」/ 김재영
연혁

연지동은 원 정주읍 연지리(蓮池里) 구역으로 연지동(蓮池洞), 서연지동(西蓮池洞), 죽림동(竹林洞), 미창동(米倉洞), 명덕동(明德洞)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보이지 않고 1912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발행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연지리로 기록되어 있어 구한국시대에 처음 생긴 명칭으로 보인다.
즉 연지교와 죽림교 중간 지점인 정읍천 북쪽에 연못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일제시대에 이르러서는 1914년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연지리(蓮池里), 죽지리(竹支里), 서외리(西外里) 일부를 묶어 연지리가 되었다.
1936년 행정구역 조정 때도 1914년 때의 구역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구전에는 지형이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이라 하여 풍수로 풀이하고 있으나 지명이 붙은 연후에 그것을 풍수설에 결부시켜 풀이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는 바 참고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1914. 3. 1 정읍군 정읍면 연지리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지리, 죽지리, 서외리 3분리로 구성)
  • 1931. 4. 1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 (읍승격으로 연지리, 죽림동, 미창동, 서연지동, 명덕동 5개분리 구성)
  • 1981. 7. 1 정주시 연지동 (정주읍에서 정주시 승격)
  • 1993.12.11 동사무소 신축이전
  • 1995. 1. 1 정읍시 연지동 (정주시, 정읍군 통합)
소지명
잔다리목
  • 정읍에서 신태인과 정우 방면으로 가는 사거리 입구로 예전에 작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정읍천의 연지교를 '큰 다리'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곳을 상대적으로 작은 다리라 칭한다. 이 연지교는 일제시대에는 나무 다리였다. 옛날 전주감영(全州監營:도청)에서 태인(泰仁), 정읍현(井邑縣)을 거쳐 남도로 내려가는 국도로서 이곳에서 정읍현아로 들어가고 연지원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잔다리는 작은 다리의 관습음(慣習音)에서 온 호칭이라고 한다. 그러나 잔다리에서의 '잔'은 잔별, 잔소리, 잔말, 잔털, 잔뼈, 잔돈, 잔다랭이(다랑이)에서와 같이 물건의 부피가 크거나 굵지 못하고 '작고 가늘다'는 뜻이 있는 말이다.
    ※ 참고「 내고장 역사의 숨결의 찾아서 」/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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