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신태인(新泰仁)에서 이평(梨坪)으로 가는 약 4㎞의 지점에서, 정읍천(井邑川조)과 태인천(泰仁川:또는 東津江) 건너는 다리(橋梁)가 있다. 그 아래 쪽에 보(洑)를 쌓은 흔적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 만석보(萬石洑)의 남는 흔적이다.
여기에는 본래 자의(諮議:司에 속하는 中央官職으로 正四品) 김명(金溟:肅宗朝 사람으 로 彦陽人이며 號를 玄谷으로 불렀다.)이 만든, 예동보(禮洞洑)가 있었다. 이 보(洑)를 광산보(廣山洑) 또는 만석보(萬石洑)라고도 했다.
1892년인 고종(高宗) 29년에 고부 군수(古阜 郡守)로 온 조병갑(趙秉甲)이 보(洑)의 수축(修築)을 빙자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고, 농민을 착취(搾取)하므로 민원(民怨)의 적(的)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유발(誘發)한 원인을 준, 유명한 보(洑)이다.
옛날부터 있었던 보(洑)아래에, 새로운 보(洑)를 만들고, 흉년(凶年)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하여, 만석보(萬石洑. 새로운 洑)라 하였다.
태인천(泰仁川)과 정읍천(井邑川)이 만나는 지점에, 멀쩡한 민보(民洑) 아래에다, 다시 보(洑)를 쌓기 위하여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負役)을 시키고, 보(洑)를 쌓는데 산주(山主)의 승낙도 없이, 큰 나무를 마구 베어 공사의 말구목으로 쓰는 바람에 원성이 높았었다.
보(洑)를 쌓은 뒤, 수세(水稅)라는 이름으로 보세(洑稅)를 강제로 거두어, 예동(禮洞:지 금의 梨坪)과 백산(白山)에 700여석을 쌓아 높았다.
이로 인하여 고종(高宗) 31년인 1894년 2월(陰)에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들이, 이 만석보(萬石洑)를 때려 부숨으로써 근대 농민혁명(近代農民革命)인, 갑오동학혁명(甲午同學革命)의 발단(發端)이 되었다.
고종 광무(高宗 光武) 2년인 1898년에 군수 안길수(郡守 安壽吉)가 이 만석보를 완전히 없애니, 배들 농민들이 안길수 만석보 혁파선정비(安壽吉 萬石洑 革罷善政碑:지금의 이평 면 禮洞앞)을 세웠다.
1973년 5월 11일에 갑오동학기념사업회(甲午東學記念事業會)에서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를 세웠다.
만석보유지비문(萬石洑遺址碑文)
이곳은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을
유발(誘發)한 민원(民寃)의 일대표적(一大標的)이 었던 만석보(萬石洑)의 유지(遺址)이다.
당시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상류(上流)에 민보(民洑)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사역(使役)하여 이 보(洑)를 막고 보(洑)의 윗논은 일두락(一斗落)에 이두(二斗), 아랫논은 일두락(一斗落)에 일두식(一斗式), 일찍이 없었던 보세(洑稅)를 받는 등 갖은 폭정(暴政)을 자행(恣行)하였다.
이에 억울한 농민들은 1894년 갑오(甲午) 2월에 전봉준 장군(全琫準 將軍)의 영도(領導) 아래 궐기(蹶起)하여 고부 관아(古阜 官衙)를 습격(襲擊)하고 마침내 만석보(萬石洑)를 훼파(毁破)하고야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동학혁명의 발단(發端)이었다.
이에 우리는 이 유지비(遺址碑)를 세워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하던 선열(先烈)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며 나아가서는 갑오동학혁명의 대의(大義)를 받들어 길이 기념코자 하는 바이다.
서기 1973년 5월 11일
문학박사(文學博士) 김 상 기(金庠基) 근식(槿識)
건입자(建立者) 정읍군수(井邑郡守) 김삼주(金三柱)
주관(主管) 갑오동학기념사업회(甲午東學記念事業會)
송 성 용(宋成鏞) 전면서(前面書)
서 병 익(徐秉翊) 후면서(後面書)
萬石洑遺址 淨化 記念碑文
이 자리는 1894년 동학농민(東學農民) 봉기(蜂起)의 발단(發端)이 된 만석보(萬石洑) 유지(遺址)이다.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의 기치(旗幟)를 세운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의 자주정신 (自主精神)은 우리의 민족운동(民族運動)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선열(先烈)들이 새로운 사회(社會)를 건설하려던 높은 뜻을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곳을 정화(淨化)하고 비(碑)를 세운다.
1987년 10월 1일
전북특별자치도지사(全北特別自治道知事) 홍 석 표(洪晳杓)
원래 정읍천(井邑川)과 태인천(泰仁川)의 상류에서 농민들이 설치한 민보(民洑)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고종(朝鮮 高宗) 30년(1893)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두 하천이 합류되는 하류지점에 농민들을 강제 징발하여 본 만석보를 축조하고, 가을에는 막중한 보세(洑稅)를 징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억울한 농민들이 봉기(蜂起)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유발하였고, 만석보는 당시 농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이곳에 1973년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하였다.
아래의 만석보 시비(萬石洑 詩碑)는 1999년 4월 18일 이평 면민(梨坪面民)의 날에 제작한 것이다.
만석보
양 성 우 지음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갑오년 흰 눈 쌓인 배들평야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그 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했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저문 남의 땅. 언덕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 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주눅들고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주눅들어서
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빌어먹을 이놈의 세상 밤도망이라도 칠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숨만 쉬였다.
제 똥 싸서 제 거름 주고
제가 거둔 곡식은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뉴월이면 송장메뚜기라도 잡아먹지
오동지섣달 길고 긴밤.
그 허기진 배 오죽했으리
모진 목숨이 원수였고 조병갑이 원수였다.
이방 포졸 떴다 하면 닭 잡고 개 잡아라.
쑥죽 먹는 신세라도 사또조상 송덕비 세워주고
사또애미 죽었으니 조의금 천냥을 어서 내라.
못살겠네, 못살겠네. 보리쌀 한톨이 없어도
억세풀 묵은 밭 천수탑 다랭이 물세를 내고
죽자사자 낸 물세를 또 내고 또 내라고 하고
못 내면 끌려 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장내리 사람들
차라리 마을마다 통문이나 돌릴까?
이 야윈 가슴팍에 비수를 꽂을까?
아비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피눈물만 있었다. 그 산비탈.
밤은 밤으로만 남아 있었고 칼은 칼로만 남아 있었다.
겉늙은 전라도 굽이굽이에 굶주림은 굶주림으로만
남아 있었고 증오는 증오로만 남아 있었다.
먼지 낀 마루 위에 아이들은 앓고
신음소리 가득히 가릇에 넘쳤나니,
오라, 장돌뱅이, 어둠타고 오라.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장성 갈재 훌쩍 넘어 서둘러 오라
맞아죽은 아비 무덤 두 손으로 치며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 소리는 솔바람 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 손님들을
찬바람 서리길 깊은 밤이면
썩은새 감나무집 작은 봉창에
상투머리 그림자들 몇몇이던가를.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은 알았다. 아이들까지도
김도삼이, 정익서, 그리고 앉은뱅이,
두루마기 펄럭이며 왔다가 가고
그 밤이면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도 죽은 듯이 짖지 않았다.
장날이 되어야 얼굴이나 볼까?
평생을 서러움에 찌든 사람들
찰밥 한 줌 못 짓는 무지렁이 대보름.
진눈깨비 내리는 대목장터에
큰바람이 불었다. 쇠전머리에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때가 차고 부스럼딱지 개버짐 피었으니,
가자 가자 손뼉치며 가자.
김제 태인 알렸느냐 최경선이를 불렀느냐?
지프라기 날리는 저녁 말목장터에
으스름 보름달 서럽게 밟고
낫 갈아 아비들은 참대를 찍었다.
드디어 때가 찼으니,
증오를 갚기 위하여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안개 낀 새벽.
해묵은 피고름 비로소 터지고
증오를 오히려 증오로 갚기 위하여
아비들은 몰려갔다. 살얼음 거친 들 꽝꽝 울리며,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그 겨울 노령남북 모여든 아비,
아비들은 몰려갔다. 곰배팔이도,
눈비바람 칼날같이 몰아칠지라도
그 누구 무단히 죽어간다더냐?
동트는 고부읍내 천둥번개로
두둥둥 북치고 꽹과리치고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꽹과리치고
보아라, 말발굽소리 크게 울리며
흰말 타고 달려오는 전봉준을 보아라.
남은 처자 불쌍하여 눈 못 감고 죽은
만 사람의 붉은피 두 손에 움켜쥐고
어이어이 말잔등 찬바람 뚫고 한거름에 여기 왔다.
이노옴, 조병갑아
자네, 손화중이 동문으로 가고
한번 지른 함성으로 삼문이 부서지고
또 한번 지른 함성으로 동헌 지붕이 불에 탔다.
창문을 열어라. 감옥문을 부숴라.
조병갑이를 놓치지 마라. 갈기갈기 찢으리라.
죽창이 없으면 괭이로 찍고
몽둥이가 없으면 발로 밟으리라.
자네, 김개남이 앞뜰로 가고
자네, 손화중이 뒤뜰로 가게.
앉은뱅이 이빨 물고 치는 북소리,
고부산천 회오리치며 크게 울렸나니
여우같은 조병갑이 옷 바꿔 입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뺑소니치고
분바른 계집들 후들후들 떨며
목숨을 빌었다. 맨땅에 엎드려.
이제와서 그 흙탕물 어찌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 붓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차라리 노래보다 몸부림으로
그 한나절 어깨춤추고
얼절씨구 곰배팔이 곰배춤 추며,
얼절씨구 곰배팔이 곰배춤 추며,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한쪽에선 만석보 허물고 온 이야기.
조병갑이 허겁지겁 도망친 이야기로
모두들 오랜만에 신명이 났다.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이윽고 산마루에 큰 달이 뜨니,
해묵은 어둔 밤을 비로소
끝내기 위하여 아비들은
빼앗은 관청마당 높은 담장 밑에
아이들이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밀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건립일시:1998년 12월 일
건 립 자:전북특별자치도지사
정 읍 시 장
갑오농민봉기유적탐구회
교통
역, 터미널에서 이평행 시내버스로 30분, 승용차로 20분
주변관광소
백운암석불입상, 도계서원, 창동서원, 전봉준선생고택, 백운암석불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