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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향교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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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향교대성전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일1984년 04월 01일
  • 소재지정읍시 태인면 향교2길 49-1

상세정보

조선조(朝鮮朝) 세종(世宗) 3년(辛丑)인 1421년에 그 때 현감(縣監) 안기(安起)가 대성전(大成殿)과 양사재(養士齋)를 세우면서 소설위(小設位)의 규모로 건립(建立)되었다.
이 향교의 특징은 외삼문(外三門) 대신 만화루(萬化樓)가 세워진 것인데, 만화루는 문묘 (文廟)의 문루(門樓)로 그 어원(語源)은 『공자지도(孔子之道) 만화화생(萬化化生)』에서 이 름 지어졌다.

이 만화루((萬化樓)가 이 향교에 세워진 것은 그 유래(由來)는 확실치 않으나 왕비(王妃)나 영상(領相)이 출생(出生)한 향읍(鄕邑)에 건립(建立)하는 것이라고 한다.
태인에는 단종왕비(端宗王妃)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지금의 칠보면 시산리(七寶面 詩山里)에서 출생한 것과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생모(生母)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탄생지 (誕生地)가 태인(泰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화루의 창건(創建) 연대(年代)는 분명치 않으나 현판(懸板)이 정조(正租) 18년인 1794 년(甲寅)에 태인(泰仁) 현감(縣監) 조항진(趙恒鎭)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곳에는 중국(中國) 제현(諸賢)인 5성(五聖)과 송조(宋朝) 사현(四賢), 그리고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향교의 조직(組織)은 주(州) 부(府) 목(牧)에는 교수(敎授), 500호(戶)의 군,현(郡, 縣) 에는 훈도(訓導), 500호(戶) 미만의 현(縣)에는 학장(學長)만 두었다.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은 대개 15,6세의 양반(兩班)집의 아들이어야 한다. 교과(敎科) 내용은 소학(小學: 中國 宋나라때 劉子澄이 朱子의 지도를 받아서 편찬한 初學者用 교양 서), 사서(四書: 論語, 孟子, 大學, 中庸) 오경(五經: 詩經, 書經, 周易, 禮記, 春秋)을 위주로 가르쳤다.

군수(郡守)나 현감(縣監)은 매달 향교의 운영상황과 교생들의 성적(成績)을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보고(報告)하면, 감사는 순시(巡視)때, 이를 시험(試驗)하고 학령(學令)에 따라 상(賞)을 주고 일강(日講), 월강(月講)에 우수한 교생(校生)에게 호역(戶役)을 감해 준다.
그리고 향교에서는 도의교육(道義敎育)으로 민간의 풍습(風習)을 길러 왔으며, 연중행사 (年中行事)로 향음주례(鄕飮酒禮: 덕행이 있는 노인들에게 경노잔치와 같은 것), 향사예(鄕射禮: 경노잔치에 활쏘기를 하는 것), 양노예(養老禮: 일반 노인들에 대한 경노행사)을 하였다.

향교의 운영은 국가(國家)에서 전토(田土)를 주어 운영하게 하였는데, 이 전토(田土)를 학전(學田)이라 했다.
학전(學田)의 크고 작은 것은 향교의 대소(大小)에 따라 달라 군,현(郡,縣)의 향교는 5결(結)씩을 주었다. 향교의 재원(財源)은 이 밖에 특지가(特志家)의 희사(喜捨)와 교생(校生)들의 출연금(出捐金)으로 충당되었다.
처음에는 매우 이 향교(鄕校)가 융성(隆盛)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많이 불탔고, 서원(書院: 私立學校와 같음)이 일어난 뒤에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고종(高宗) 31년 갑오경장(甲午競張) 뒤에는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없어지자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써의 힘은 없어지고, 옛 성현(聖賢)을 모시는 제사의식(祭祀儀式)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의 향교에서는 대성전(大成殿)은 문묘(文廟: 孔子를 비롯하여 四聖 이하 中國 歷代의 大儒와 新羅 이후의 朝鮮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집)이고, 명륜당(明倫堂: 조선때 成均館 에 설치되어 儒學을 講義하던 집)은 강의실과 같은 구실을 했으며, 동서재(東西齋)는 기숙사(寄宿舍)의 역할을 했다.
원래 태인(泰仁)은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 두 고을을 병합(倂合)하여 된 고을이다.
그 전에는 각 고을로 두 곳에 향교(鄕校)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태종(太宗) 9년(乙丑) 인 1409년에 두 현(縣)이 합병되고, 태종(太宗) 16년(丙申)인 1416년에 치소(治所)를 두고 을의 중간인 거산리(居山里)에 두었다가 그 뒤 지금의 태인(泰仁) 소재지(所在地)로 옮겼던 것이다.

지금은 인의현(仁義縣)의 향교(鄕校) 터(遺址)만 신태인읍(新泰仁邑) 백산(栢山)의 서쪽 기슭(西麓)에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유학(幼學)의 전통이 깊은 고장인 탓이겠지만, 역대(歷代) 수령(守令) 가운데 흥학(興學)에 힘쓴 사람이 많으니 신 잠(申 潛), 고용후(高用厚), 오희길(吳希吉), 조상우(趙相愚), 이익저(李益著), 김시보(金時保), 허 후(許 逅), 유 유(柳 兪), 조 정(趙 政), 서호순 (徐灝淳), 심능숙(沈能淑), 이승경(李承敬), 박희성(朴羲性), 홍범식(洪範植) 등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제사(祭祀)는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석전제(釋尊祭)를 지내고, 한달에 두 번인 삭망(朔望)과 분향제(焚香祭)를 올리고 있다.
현재 묘우(廟宇)로는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장수재(壯修齋),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전직사(殿直舍), 만화루(萬化樓) 등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正面) 세칸(三間), 옆면 세칸(三間)의 크기로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기초(柱礎)는 둥글게 화강암(花崗巖)으로 잘 다듬어 놓았다. 가운데는 네짝의 널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쪽에는 새살의 살창을 붙였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正面)이 다섯칸(五間), 옆면이 세칸(三間)의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이며, 좌우 양합각(兩合角)에는 방풍판(防風板)을 달았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배치(平面配置)는 가운데 세칸(三間)이 대청(大廳)이며, 좌우 양측에 각각 방(房) 한 개씩이 들어 있다. 대청(大廳) 앞에는 세 살의 사문합문(四門合門)을 달아 드나들도록 하였다.

전해오는 유물(遺物)로는 제기(祭器), 제복(祭服), 서적(書籍) 등이 향교지(鄕校誌)와 비품(備品) 목록(目錄)에 기록되어 있다.

태인향교 건립비(泰仁鄕校 建立碑)

공부자(孔夫子)는 만세(萬世)의 스승으로 성교(聲敎: 성인이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교육)가 중외에 차고 넘쳐 베풀어서 미치지 않은 데 없다.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그를 인륜(人倫)의 지극한 것으로 존중하고 믿지 아니한 자 없다.
경술(庚戌)년 나라를 빼앗긴 후로부터 모든 것이 황폐되어 몇길 궁궐 담장도 또한 거의 풀이 우거져 덮이게 될 것이다.
전교 김상기(金相基)와 장의 여러분과 더불어 이를 탄식하며 충분히 의논하며 다행히 고을 안의 유림들의 정성을 다함에 힘입어 묘우(廟宇)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니 오도(吾道)가 하늘에서 성인에게 맡겨진 것임을 잊지 않았음을 가히 볼 수 있다. 이름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한다.


공자탄강 2518년 정미 2월 상정(上丁)
후학 강지 김 균 근지
장의 나주 임 형 규 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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