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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彫刻像)은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명관(名官)이던 영천(靈川) 신잠(申潛: 1491~1554) 선생의 영상(影像)이라고 믿어 오고 있다.
신잠 선생은 중종(中宗) 38년(1543: 癸卯)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하여 명종(明宗) 4년(1549: 己酉)까지 6년간 동,서,남,북(東西南北)의 4학당(學堂)을 세워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많은 치적(治積)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후 강원도(江原道) 간성(杆城) 군수(郡守)로 떠나게 되자 고을 백성들은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고 성황산(城隍山: 泰仁)에 당우(堂宇)를 지어 선생의 조각상(彫刻像)과 부인(夫人), 큰아들(長子)의 상, 그리고 시녀상(侍女像), 호상(虎像)까지 함께 봉안(奉安)하여 선생을 기념 하였다.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每年) 정월(正月) 삭망(朔望: 一日과 十五日)에 신잠 선생께 제사(祭祀)를 올려 태인(泰仁) 고을의 태평(太平)과 국세(國稅) 상납시(上納時) 풍랑과 도적 같은 불상사(不祥事)가 없기를 기원하였다.
이곳을 성황당(城隍堂)이라고 불러왔는데 이 영상(影像)을 봉안했던 성황당은 1950년경에 낡아 헐어졌으며, 영상(影像)은 현재 태인면사무소에 보존되고 있다.
1998년에 항가산(恒伽山: 相遠亭 옆) 중턱으로 새 집을 지었으나 아직 옮겨가지는 못했다.
영상은 모두 나무(木材)로 만든 입상(立像)이며 조각수법(彫刻手法)이 매우 정교(精巧)하나 만든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크기는 신잠 선생(申이 潛 先生) 86.5㎝, 부인상(夫人像) 76.5㎝, 장자상(長子像) 58.5㎝, 시녀상(侍女像) 55.5㎝, 호상(虎像) 61.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