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석점(石店)은 면소재지에서 신태인 방향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아랫동네, 윗동네, 배촌(배씨들이 살았던 마을), 석정리를 포함해서 부르는 지명이나 원래는 석정리(石井里)였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할 정도로 교세가 컸었던 곳이나 개종자(改宗者)가 늘면서 현재는 전체마을 주민 43가구 가운데 17가구만이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다. 당시에는 유정리 옥신(玉信마을과 화봉리(花峰里) 천곡마을 그리고 칠보, 김제 수류, 원평, 산외 구장리 등 원근에 있던 교우들이 미사를 드릴 정도로 교세가 컸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장이나 제작소를 점,소,막,장,방(店, 所, 幕, 匠, 房)등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石店 이라는 지명은 옛날 옹기를 구웠던 곳이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보통 옹기 생산은 비산비야(非山非野) 지대인 낮은 야산지역이 적지였다. 지금은 개간이 되어 평야지대로 바뀌었으나 예전에는 부근 일대가 야산이었다. 마을이 공동묘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교우들은 옹기장사를 하면서 관의 눈을 피해 옹기 속에 편지를 넣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공장은 수 년 전에 폐쇄되었다. 공소(公所)설립 이전에는 당시 회장이었던 신용운(1922년생)씨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1950년대 위쪽에 현재의 공소(公所)를 건립하였다. 신용운씨의 아들인 신일철씨에 의하면 증조부께서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박해를 피해 부안(扶安)으로 왔다가 임피(臨陂)에서 보부상(褓負商)으로 큰 돈을 벌었으나 도둑떼의 기습으로 사망하고 조부님대에 석점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천곡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감곡면 대부분의 마을이 그렇듯이 이곳도 야산을 개발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예전에 도돔실이라 불렀다. 마을 주민 20가구 중 6가구가 천주교 신자이며, 둘째 주와 셋째 주에 신태인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公所가 없는 관계로 첫째 주와 넷째 주에 회장인 유천희씨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옥신(玉新)은 옥단(玉丹)과 신기(新基)의 합성지명으로 1970년 후반에는 110여 가구를 헤아릴 정도로 대촌이었으나 이농(離農)으로 현재는 63가구만이 살고 있다. 1987년 11월 공소(公所)가 설립되고 주교에 범영배 신부, 축성에 박정일 신부였다. 공소(公所)가 없던 시절에는 태인 본당으로 가서 미사에 참여했었다. 현재 16가구가 천주교 신자이며 장기천(54세)씨가 공소(公所)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