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증산 강일순이 태어난 신월리 신송마을은 진주 강씨가 집성촌을 이룬 곳으로 '손바래기'로 불리던 마을이다. 이곳은 호남의 삼신산 중 하나인 두승산[영주산]으로부터 연결되어 온 지맥이 망제봉(望帝峰)과 시루산을 거쳐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을 이룬 곳이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에 동학농민운동의 승전지인 황토현이 있다. 증산은 신월리 436번지,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태어났고, 종도 김성연이 신월리 433번지의 집을 구해 줄 때까지 증산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대종교가의 탄생지라는 종교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이 큰 곳이다. 바로 앞에는 증산이 어린 시절 마당을 파헤친 곳에서 유래한 우물이 있고, 인근에 증산이 수도하였다는 시루산 호둔 바위, 즐겨 마셨다는 샘골 등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 증산 강일순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이다. 1871(辛未)년 9월 19일(음)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에서 태어난 그는 구한말의 대종교가로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민족종교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증산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고 남달리 총명하여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았으며, 나무 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을 만큼 호생(好生)의 덕이 두터웠다. 그의 호인 증산(甑山)은 자신이 태어난 객망리 시루산[시루 증(甑)]에서 유래한 것이다.
24세인 1894(甲午)년에 글방을 차리고 이웃의 서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니 그 비범함을 모든 사람이 칭송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정은 부패하고 민생은 날로 악화하였고, 전봉준이 악정(惡政)에 분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던 동학군이 패배하며 이후 나라 안팎으로 시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민중들은 희망을 잃고 참담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때 증산은 천하를 바로잡아 구하겠다는 광구천하(匡救天下)의 뜻을 세우고,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의 길을 떠났다. 증산은 삼 년 동안 전국 8도의 유력(遊歷)을 마치고 30세(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901년 5월 중순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49일간 불음불식(不飮不息)의 공부를 통해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었다. 이후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고 화천(化天)하였다. 이후 그를 신봉하던 무극도, 보천교 등의 민족종교는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세력을 이루며 민족운동을 펼쳤다.
증산은 당시의 국내외적 혼돈의 상황을, 상도(常道)를 잃고 무도(無道)해진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 까닭을 ‘인간 사물이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에 원한이 쌓이고 맺혀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를 채웠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그리고 ‘천지도수(天地度數)를 상극(相克)에서 상생(相生)으로 전환하는 역사(役事)’로서 천지공사를 행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후천개벽 사상을 배경으로 상생ㆍ인존ㆍ평화사상을 담고 있다.
특히, 해원상생은 그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해원은 인간ㆍ신명ㆍ세계에 쌓인 ‘원한을 풀어가는 것’이고 상생은 ‘남을 잘 되게 하여 모두가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해원상생은 ‘원한을 풀고 함께 잘 산다’라는 말이다. 이러한 해원상생의 사상은 외연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너와 나,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적용되며, 나아가 전 세계인의 화합과 평화를 이루려는 인류 대망의 가치를 담고 있다.
한국 근대 민족종교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그의 사상은 동학사상과 함께 근대 한국종교의 양대 사상으로 손꼽히며, 이러한 역사ㆍ문화적 평가를 바탕으로 2012년부터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의 ‘한국의 고유 윤리 사상’ 편에서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