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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 위치고

망부석(望夫石)은 정읍사(井邑詞)와 더불어 1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전해 내려오며 또 영구히 보존되어야 할 유적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망부석(望夫石)의 위치에 대한 학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의 학증을 찾는 일은 정읍사(井邑詞)를 연구하고 또 향토사를 정리하는데 우리의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부석(望夫石)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읍현지(井邑縣誌) 고적조(古跡條)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즉 望夫石 정읍현 북쪽 10리(里)에 있는데 자취가 아직도 있다고 하였다.
(縣北十里…足跡猶在)
현 (縣) 북쪽 10리에 대한 상반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백제(百濟)때의 정읍현(井邑縣)의 고을터가 즉 정촌현(井村縣)의 현치(縣治 所在地)가 "새암바다" (井海)에서 북쪽 10리(里) 지점을 시기동(市基洞)과 과교동(科橋洞)의 경계인 아양동(阿洋洞)에 속한 "서당당재"로 추정하는 것이다.
"서당당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아요현(阿要峴)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아요현(阿要峴)은 예로부터 남북(南北)을 내왕하는 교통의 요처이었던 것이다.
이 고개를 "망부석"의 유적지로 추정하는 별다른 고증자료는 없는 것이다.
물론 "망부석"이라고 추정할 만한 어떤 형태의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너무나도 막연한 상상으로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기록을 살펴볼 때 모든 방위와 거리의 표시가 편찬 당시 즉 조선(朝鮮) 초기 정읍현의 현아(懸衙) 소재지인 현 정읍시(井邑市)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例) 「內藏山 在顯東 二十五里」(내장산 현 동쪽 25리)
迎池院 在縣西五里 (영지원(迎池院 現 蓮池洞) 현 서쪽 5리)
望夫石 縣北十里("망부석" 현 북쪽 10리)
또 하나의 다른 견해는 망제동(望帝洞)의 부례리(夫禮里)로 추정하는 주장이니 그것은 현(縣) 북쪽 10리를 정읍현의 고을터였던 현 정읍시(井邑市)를 전제로 하는 견해이다.
"부례리"의 후록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고 추정하려는 것이다.
"부례리"라는 주장은 왜정(倭政)때 일본인(日本人) 학자의 발설에서 비롯하여 근래에까지도 이를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 "망제동"은 원래 고부군 우덕면(古阜郡 優德面)으로 1914년에 정읍군(井邑郡)으로 폐합된 곳이니 정읍(井邑) 고을이 아니기 때문에 거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만일 "망제동" (望帝洞) 이었다면 "망부석"이 "고부군"에 속했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망제동"은 예부터 고부군(古阜郡)에 속했던 것이다.
필자(筆者)는 근래 정읍시(井邑市)의 지명(地名) 동명(洞名) 자료를 수집하느라 실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정읍시 수성동(井邑市 水城洞)에서 "괴바라기"라 지명을 규명하다가 "망부석"의 유적일 가능성에 이른 것이다. 지명이나 동명은 대개 어떤 유래와 연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곳 "괴바라기"라는 지명은 유래의 설명이 구구(區區)한 것이다.

지형(地形)이 고양이 형국이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라는 풍수설(風水說)이 있는가 하면, 혹자는 "정읍현"의 긔(旗)를 바라보는 곳이라는데서 "긔바라기"라 주장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 고을의 입구에 현감(縣監)이 있고 없는 것(在不在)을 알리는 긔(旗)를 바라다 보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제도가 있었는지 여부도 그리 알려져 있는 사실도 아닐뿐 아니라 이곳에서 10리(里) 거리에 정읍현의 기를 바라볼 수 있는 곳도 못되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괴바라기"의 유래는 아마도 정읍사(井邑詞)의 망부석(望夫石)에서 연유한 지명이 아닌가 한다.
"괴바라기"의 어의(語義)를 풀어본다면 "괴"는 "유난히 사랑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바라기"는 "바라본다"의 명사형(名詞形)이니 어떤 그리움을 바라다 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망부석"의 주인공인 이 여인은 평생 동안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채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서 남편이 여느 때나 다니던 들판 건너의 재(嶺)를 바라다 보며 세월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곳을 과부(寡婦)가 바라다 보던 곳이라는 뜻으로 "과바라기"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로는 현(縣) 북쪽 10리(里)라는 방위(方位)와 거리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기록과 부합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치(縣治)의 소재지 즉 고을터를 현 정읍시(井邑市)를 전제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괴바라기"는 예부터 정읍현(井邑縣) 북일면(北一面)에 속하여 정읍현아(井邑. 東軒所在地)로부터 북쪽 10리(里)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足跡猶在」
(발자취가 아직 남아 있다)라 한 것은 어떤 물형(物形)의 자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괴바라기"라는 지명을 가리키는 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괴바라기"의 지리적(地理的) 위치를 살펴본다면, 여인이 바라본 방향은 서쪽으로 덕천(德川) 평야 건너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당시 고사부리(古沙夫里)가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인의 남편이 장사 나가는 곳은 필시 고사부리(古沙夫里) 방면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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