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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전통문화|판소리|단체

단체

단체

조선조 시대에는 판소리만을 위한 단체나 조직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대체로 판소리 광대들은 무계(巫契)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관아의 신청(神廳)에 소속되어 있었다. 신청에는 대방, 도산주, 집강 등의 관직이 있어서 업무를 관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무계에는 판소리를 하는 광대뿐만 아니라 공인이라 불리는 악사들과, 춤이나 줄타기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계는 판소리 창자들만의 조직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뒤에는 자연히 조선조의 조직이었던 신청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소리꾼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생긴 공연단체인 협률사를 통하여 활동을 계속하거나, 전통적인 공연 형태였던 부잣집에 초청되어가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판소리와 관련된 새로운 조직이 생겨난 것은 1920년대 무렵의 권번이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조합으로서, 가무를 가르쳐서 기생을 양성하고, 또 기생들의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등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역할이었고, 판소리 또는 국악과 관련해서는 교육기관으로의 의의와 기능이 훨씬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권번이 일제시대를 통틀어 중요한 판소리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것은 여자 소리꾼과 관련해서이다.
조선조 말에 고창 출신 진채선과 허금파로부터 시작된 여창은 일제시대에는 매우 보편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는 물론 판소리의 유흥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권번은 대체로 그 지방의 돈 많은 한량들이 사비를 모아 문을 열었고, 전국에서 소문난 국악인들을 초빙하여 지도선생으로 임용하였으며, 그들 자신이 운영위원이 되어 운영하였다.
판소리는 역시 남성 위주의 음악이었기 때문에, 권번의 학습생들은 여자들이었지만 선생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남자소리꾼 치고 권번의소리 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권번은 또 자연히 전국의 명창들이 모이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판소리사에서 권번이 중요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악 애호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읍 권번은 1928년 경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에는 정읍의 대부호로 만석꾼이었던 김평창과 그의 둘째 아들인 김기남이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수많은 기생들을 거느리고 여러가지 음악 들을 가르치면서 후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평창은 일제 이전 조선조에 정읍에 머물러 살면서 음률로 소일했던 대단한 국악 애호가였다.
그러다가 1928년 경에 정읍 고부출신 은회상(1892년 경에 나서 1960년경 사망)과 박홍규(1899년에 나서 1957년에 사망) 등이 시기리에 예기조합을 설립하고 체계적으로 국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은회상은 대부호는 아니었으나 살림이 비교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으며, 소방대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는 대단한 국악 애호가로, 이때부터 1948년 권일상이 국악원으로 개칭하여 원장을 맡기까지 무려 20여 년간이나 예기조합장으로 있으면서 이 지역 국안인의 발굴과 공급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때 예기조합 총무를 맡아 실무를 처리했던 사람은 이 지역 출신으로 대단한 명고수였던 박홍규였다.
박홍규는 죽을 때까지 정읍예기조합과 정읍국악원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고 한다.

1948년 예기조합에서 국악원으로 개칭하고 권일상(1907년 생으로 현재 생존해 있다)이 원장을 맡았다.
권일상은 정읍 출신으로 정읍농고를 졸업하고, 농회기수, 민선읍장 등을 역임했는데, 판소리를 좋아하며 읍장 재직 시절에도 출근부에 날인한 후에는 곧 국악원에 나갈 정도로 대단한 국악 애호가였다고 한다.
권일상은 1980년까지 국악원장을 맡아 정읍의 국악 발전에 헌신하였다.
1978년 정읍 국악원은 그동안 늘려온 재산으로 현위치에 건물을 짓고 이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악원장은 조동영(75세)이며, 강광례가 소리 선생을 맡고 있고, 회원은 80여 명에 이른다.

해방 전에 정읍 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한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유성준, 조몽실, 신영채, 이기권 등이며,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운학, 김준섭 등도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정읍 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있었다고 한다.
정읍 권번은 한때 소리를 배우는 사람이 50여 명에 이르고, 내노라하는 명인 명창들이 사범으로 초빙되어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읍 권번이 배출한 명창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정읍 권번과 인연이 닿은 사람은 현재 군산에 살고 있는 성운선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기타 판소리 동호인들의 모임으로는, 1958년 10월 15일 창립된 일심계와, 거의 같은 무렵에 조직된 초우회, 국악동지회가 있었는데, 이들 세 단체들은 1976년에 신악회로 통합된 바 있었다.
1984년에는 창악회가 또 결성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은 1987년 10월 25일 정읍 국악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정읍국악원과 통합하여 현재의 정읍국악원이 되었다.

그 동안 정읍국악원에서 활동한 바 있는 소리꾼들로는 임옥돌, 공대일, 안기선, 서동순, 김성수, 김홍남, 홍정택, 최광렬, 박홍남, 박봉남, 한승호, 최난수, 임준옥, 성옥란, 김명신, 강광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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