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출신
정읍 지역의 판소리 창자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읍 지역의 전통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부 출신의 명창인 박만순으로부터 출발하여, 전도성, 신영채, 김원술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외에 정정렬도 전도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지역 출신 명창으로 이름이 있었던 백근룡은 별다른 제자를 두지 못하여, 이 지역 판소리의 전승과 발전에 뚜렷이 공헌한 바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논외로 한다.
둘째, 정읍 권번과 정읍국악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권번이나 국악원의 사범이나 소리 선생을 했던 사람들인데, 유성준, 조몽실, 신영채, 이기권, 이운학, 김준섭, 임옥돌, 공대일, 안기선, 서동순, 김성수, 김흥남, 홍정택, 최광렬, 박홍남, 박봉남, 한승호, 최난수, 임준옥, 성옥란, 김명신, 강광례 등이 그들이다.
셋째, 정읍 지역을 주요 무대로 하여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읍의 인근 지역에 살면서 정읍 일원까지 나다녔다. 박대근, 박경천, 전득송, 김동준, 신갑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위의 순서에 의해 각 소리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박만순
박만순은 판소리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정읍 지역 판소리꾼이다.
그는 고부 출신인데, 고부는 고려시대 이후 이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판소리의 고급 수요자가 있었을 것이며, 이 점이 박만순과 같은 대명창의 출현에 간접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정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광범위한 판소리 소비층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겠으나, 초기의 민중 중심의 판소리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데 고을의 수령 등의 참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통적으로 크고 풍요로운 고을의 치소(治所)였던 고부는 명창이 나올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리를 상대할 수 있는 소리꾼은 일반 민중들을 상대하는 소리꾼들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분적인 벽을 넘어 양반들을 직접 상대함으로써 얻어지는 사회적 만족도도 대단한 요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만순은 처음에는 전주의 주덕기에게 배웠으나, 후에 가왕 송홍록에게 배워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는 송홍록의 문하에서 「춘향가」 중 옥중가를 적공(積功)하고, 전라감사가 집무하던 전주 선화당에서 첫소리 한 바탕에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풍부한 성량과 맑고 고운 성음은 송홍록 이후 제일인자였는데, 성격이 오만하여 결코 권세의 위력에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자부심과 오만함은 충청감사 조병식과의 사이에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박만순이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던 도중에 충청도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충청감사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충청감사의 소리 요청을 받은 박만순은, 대원군께서 입을 봉하고 올라오라는 영을 내렸다는 핑계로 이를 거절하였다.
대원군의 사랑에서 일년 남짓묵으며 무과 선달의 직첩까지 받은 박만순은 귀로에 충청감사에게 당할 것이 염려되어 대원군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대원군은 서찰을 하나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박만순의 소행은 죽어 마땅하므로 임의 조처하되, 다만 그 절세의 소리를 들어 보고 죽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불려간 박만순의 소리를 들은 조병식은, '과연 명창이다.
그대는 국가의 보배이니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하고는 그를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 여부를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이 이야기가 박만순의 예술의 출중함과, 그 예술에 대한 박만순 자신의 자부심을 전하고 있음은 감지할 수 있다.
박만순의 성음은 양성이었다고 하며, 우조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전력을 다하여 한번 소리를 내지르면 그 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박만순은 맑고 큰 목소리의 전형적인 동편제 소리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키는 작은데다 뒤통수가 주먹만큼 튀어나와 생김새와 체격은 볼품이 없었으나, 언어와 행동은 유가의 기풍이 있었고, 명창을 대하면 그들의 소리를 일일이 비평하였다고 한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 중 '사랑가'와 '옥중가', 「적벽가」 중 '화용도'와 '장판교 대전'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옥중가 중 춘향 몽유 대목이 그의 더늠으로 실려있다.
춘향 몽유 대목은 춘향이 옥중에서 황릉묘를 찾아가 만고 열녀로 추앙을 받고 있는, 순임금의 두 왕비인 아황과 여영 등을 만나는 대목이다.
현재 이 대목은 거의 모든 「춘향가」에 들어있으나 사설은 매우 다르다. 일제시대에 나온 정정렬의 음반에 실려있는 이 대목이 박만순의 더늠과 상당히 유사한데, 이는 정정렬이 전도성과 자주 만나 소리에 대해 물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 대목이 전도성을 거쳐 정정렬에게 이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만순의 생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대체로 그의 활동 시기는 19세기 후반에 치중되었던 것 같고, 19세기 말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향년은 예순넷이었다고 한다.
전도성
전도성은 1864년 임실군 관촌면 병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친 전명준에게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10년간 계속하였다.
21세 때는 진안에 있는 물목 매봉재라고 하는 산중에 들어가 2년간 독공하였으며, 28세 때 송우룡 문하에서 1년간 연마하여 비로소 판소리의 방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 등으로부터 견문을 넓혀 42세 때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특히 전도성은 박만순을 3년간이나 따라다니면서 그의 소리를 익혔다고 한다. 이같은 전도성의 판소리 수업과정을 보면, 전도성 판소리는 어려서부터 배운 자기 가문의 소리에 송우룡의 소리가 보태어져 질적인 변모를 이루고, 다시 박만순의 소리를 만남으로써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김세종, 이날치 등의 소리는 전도성의 소리에 제한적으로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하다.
전도성은 40세 경에 임실에서 태인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산악지대인 임실보다는 평야부인 정읍이 판소리의 고급 소비자가 많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 활동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추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전도성의 제적등본을 보면, 1936년에 정읍군 북면 화해리에서 태인면 낙양리로 전적한 것으로 되어 있어, 정읍에 와서도 이사를 한 사실이 확인된다.
전도성의 목은 양성으로 성량이 좀 부족하여 수천의 청중을 휩쓸지는 못했어도, 그 복잡한 곡조와 대단한 기량은 일류 고수가 아니면 북을 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전도성은 맑은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며, 매우 기교적인 소리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도성은 또한 판소리의 역사와 이론에 소상하였고, 비평에 있어서도 당시 제일인자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이같은 전도성의 능력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창극사』는 정노식의 저서이지만 사실은 전도성의 증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도성의 유일한 생존 제자인 김원술의 증언에 의하면, 정노식은 전도성의 집에 와서 장기간 머물면서 전도성의 증언을 듣고 이를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전도성은 고종 황제 앞에서 소리를 한 어전명창으로,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어전명창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전도성은 또 판소리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참여했던 「협률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음반 취입도 하지 않아서, 당시 소리꾼 대부분이 음반을 남긴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역시 김원술의 증언에 의하면, 전도성은 음반이 대량으로 유통되어 시장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싫어하여 취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송만갑과 주고받았다는 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전도성은 송만갑을 만나면, '군은 자가의 법통은 고사하고, 고제(古制)의 고아한 점을 멸살하고, 너무 통속적으로 수천의 남녀 제자에게 퍼뜨려 놓아서 공죄상반(功罪相半)하다'고 했고, 이에 대하여 송만갑은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합리하다'고 맞서면서 서로 탄식했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임하여 판소리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입장을 고집하는 전도성과, 판소리의 생존을 위하여 전통의 변화마저도 감행하려는 송만갑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이 대화는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전도성의 판소리는 전통과 함께 옥쇄를 하고 말았고, 송만갑의 판소리는 그 세력이 악화된 가운데 아직도 현대 판소리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전도성은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 외의 소리도 모두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고전에도 능통하여 실전 7가도 대부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증언의 신빙성은 엄격한 검토를 해야 하겠으나, 일단 이 증언을 수용하면, 20세기 이전에 7가가 전승에서 탈락했다는 판소리사의 정설은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전도성은 신영채, 김원술 등의 제자를 두었으며, 정정렬도 자주 전도성에게 소리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로 보아, 정정렬의 소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전도성의 유일한 생존 제자인 김원술마저도 소리를 중단한 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전도성의 소리는 이제 전승이 끊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신영채
신영채는 1907년 부안 태생이라고도 하고, 정읍군 칠보면 석탄리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세가 적빈하여 유명한 대가에게 배우지 못하고, 처음에는 무명의 소리꾼에게 귀동냥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5세 때부터 엿장수를 하게 되어 엿을 팔면서 돌아다니다가, 19세 되던 해에 지난날의 명창 전도선이, 소리조로 엿을 사라고 외치는 신영채의 소리를 듣고 불러들여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신영채를 가르쳤다는 전도선이라는 명창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생전의 신영채를 자주 접촉했던 김원술, 홍용호, 송영주 등은 신영채가 전도성에게 배웠다고 했다.
특히 김원술은 신영채가 전도성에게 소리를 배우러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런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전도성이 혹 전도선이라는 소리꾼에게 처음에는 배웠을지 모르나, 자신의 소리를 완성시킨 것은 전도성에게 소리를 배운 후였음에 틀림없다.
신영채는 1938년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1940년 이동백, 박녹주, 조몽실 등과 조선음악단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또 신영채는 정읍 예기조합 시절의 대표적인 소리 선생이기도 했다.
신영채는 「적벽가」와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는데, 특히 그의 귀곡성과 아롱성은 신기(神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한때 신영채를 좋아하여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던 김성수는, 깊은 밤에 신영채가 '귀곡성'을 내면서 소리를 하면 무서운 마음이 왈칵 들어 사람들이 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신영채는 성량이 작아서 무대소리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방안 소리에는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어서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던 임방울마저도 같이 소리하기를 꺼렸다고 했다.
그의 소리는 처음에는 사뿐사뿐 가볍게 엮어가다가, 갑자기 공력을 들여 갖은 기교를 다 부리는 창법을 구사했는데, 그 기교에는 누구든 넋을 잃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신영채는 당시 많은 소리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편에 중독이 되어 말년을 비참하게 보냈다고 한다.
신영채의 말년 행적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김성수는, 신영채가 1955년 경 부안군 백산면 월산리에서 죽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영채의 비참한 생활을 보다 못한 월산리의 청년들이 약간의 전답을 마련해 주면서 그곳에서 살도록 했으나,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신영채는 매우 불우했던 소리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살아야 했던 시기가 민족사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던 점을 상기할 때, 신영채의 불행을 개인만의 것으로 돌려버릴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영채가 그 흔한 음반 한 장 낼 수 없었던 이유도 그의 전성기가 해방 전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김원술
김원술은 1921년 정읍군 감곡면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당시 인근에 살고 있던 전도성에게 찾아가 판소리를 배웠다.
3년 간의 학습기간을 통해서 김원술은 전도성으로부터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20세 무렵에는 군산 권번에 있던 이기권을 찾아가 「숙영낭자전」을 배웠으며, 25세 무렵에는 박동실로부터 「역사가」를 이수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숙영낭자전」은 정정렬이 만들어 불렀다는 것으로, 그 일부가 1930년대의 유성기관에 녹음되어 남아 있기도 한데, 이기권은 정정렬의 수제자로 정정렬 소리의 대부분을 전승하였기 때문에 「숙영낭자전」 또한 김원술에게 전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동실은 이날치 판소리를 했던 사람인데, 6·25 때 정남희, 공기남 등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박동실은 해방 직후 이준,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등 항일열사의 행적과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엮어 판소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소위 「역사가」 또는 「열사가」로 불려지는 신작 판소리이다.
이 「역사가」는 해방 후 상당 기간 동안 민중의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1942년부터 3년 동안 김원술은 전주에서 전동 권번의 소리선생을 했으며, 1948년 전주에서 개최된 호남명창대회에서 신영채, 이기권에 이어 3등에 입상하기도 했으나, 호남명창대회 이후에는 직접 소리를 하지 않고 국악 공연단체의 운영에 투신하였다.
김원술이 직접 소리를 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고 단체의 운영에 주력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가 이른바 비가비로 불리는 양반 집안의 자손인 점이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김원술의 조부는 성균관 박사를 지냈으며, 그의 부친도 500여 석을 추수할 정도로 가세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국악단체의 운영에 나선 김원술은 1953년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여성국악단, 신라국악단, 대한국극협단, 임방울 일행 등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창극마저 대중의 인기를 잃고 몰락해가자 김원술은 단체의 운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김원술은 국악계를 영원히 떠나지 않고,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대한민국 국악협회 부 이사장, 1979년부터 1984년까지는 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악대상을 제정하는 등 국악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1972년부터 1973년까지는 전주 대사습놀이 보존회 이사장을 맡아 전주 대사습놀이의 복원을 위하여 노력하기도 했다.
김원술은 현재 정읍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국창 전도성제 판소리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사단법인 한국 전통예술 진흥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원술은 전도성의 유일한 생존 제자이나, 소리를 그만둔 지 오래 되어서 현재 부를 수 있는 대목은 많지 않으며, 한 사람의 제자도 두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성의 소리는 이제 역사 속의 판소리가 되어가고 있다.
이상 정읍 지역 판소리의 전승 계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성근
이성근은 비록 정읍 지역 소리의 전통 속에 있지는 않지만, 현재 소리꾼으로 활동하고 있는 극소수의 정읍 출신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은희진
은희진은 1947년 정읍군 영원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광주에서 오천수에게 판소리 공부를 하였다.
이어서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웠고, 수 년간이나 수련을 계속한 끝에 그 기능을 인정받아 1976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발탁되었다.
국립창극단에서 창극 연기를 익히는 한편, 성우향에게 「춘향가」, 오정숙에게「흥보가」를 익혔으며, 조상현을 사사하여 「강산제 심청가」를 이어받았다.
1980년 남원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1981년 국립창극단을 떠나면서 일시 부진하였다.
그러나 1984년 다시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였고, 1988년에는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은희진은 정읍 지역의 전통적인 소리를 전승하지는 않았으나, 장래 한국의 판소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촉망받고 있다.
더구나 현대에 오면서 남자 소리꾼의 기근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 비추어 은희진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