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예기조합,권번 활동
유성준
유성준은 1874년에 나서 1949년에 죽었으며, 남원 출신 혹은 구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어느 곳에서 출생하였는지는 알수 없지만, 구례읍 용방리와 하동군 악양면에서 살았던 사실은 확인된다.
그러나 구례를 거쳐, 하동군 악양에서 죽은 것만은 확실하다.
유성준은 송만갑과 함께 송우룡에게 배웠으나, 송만갑 생전에는 송만갑이 너무 유명하였기 때문에 별로 빛을 보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성준이 하동으로 옮겨간 것도, 그의 처가가 하동이었다는 점 외에도 구례에 있는 한 송만갑의 그늘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현실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유성준은 전도성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던 판소리 평론가라고 한다.
판소리에 대하여 전도성과는 견해를 달리 했다고 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오지 않아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전도성이 엄격하게 전통을 고수하려고 했던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 데 반해, 유성준은 다소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볼 수는 있다.
이 점은 전도성이 판소리의 세속화를 반대하여 녹음을 남기지 않았던 데 비하여, 유성준은 비록 「적벽가」한 대목이기는 해도 녹음을 남긴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성준은 송만갑과는 달리 협률사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주로 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하거나,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소리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성준은 하동, 진주, 경주 등지에서 선생을 했는데, 정읍에도 아마 그런 인연으로 오지 않았는가 한다.
유성준이 각광을 받은 것은, 송만갑을 위시해서 이른바 근대 5명창들이 1940년경 다 죽고나서부터이다.
5명창 이후에 그와 같은 수준의 소리꾼이라고는 유성준이 거의 유일한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유성준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현대 판소리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성준에게 배운 사람들을 보면 임방울(「수궁가」와「적벽가」), 김연수(「수궁가」와「적벽가」), 정광수(「수궁가」와「적벽가」), 박초월(「수궁가」), 박동진(「수궁가」), 강도근(「수궁가」) 등이다.
이들은 해방 후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유성준의 현대 판소리에 대한 공헌이 어느 정도였나를 잘 보여 주는 사람들이다.
「수궁가」와 「적벽가」의 경우는 유성준의 소리가 현대 판소리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유성준은 성격이 매우 괴팍했다고 한다.
그의 생질인 김정문이 결국 그에게 소리를 다 배우지 못하고 송만갑의 제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거나, 강도근이 배우러 갔다가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괴팍한 성미를 견디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박동진 또한 유성준이 임방울을 가르칠 때 임방울을 여러 차례 목침으로 두들기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몽실
조몽실은 1900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사는 공창식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공창식은 김채만의 제자로 전형적인 서편제 소리꾼이었다.
따라서 조몽실은 공창식을 통해서 박유전에서 이날치와 김채만을 거쳐서 공창식으로 이어져 내려온 전형적인 서편제 소리를 익힌 것이다.
그후 조몽실은 또 다른 서편제 가객이며 근대 5명창의 한 사람인 나주의 김창환에게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이수하였고, 고향에서 3년간 홀로 독공을 하였다.
조몽실은 목이 탁한 데다가 성량 또한 부족하였고, 목이 자주 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을 그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극복하였다.
어려서 조몽실에게 때마침 '봄이로다, 나비 날고, 꽃이 피니'하는 단가를 배운 바 있는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 홍정택은, 조몽실의 소리는 수천 번 갈고 닦아서 잘 윤을 낸 소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조몽실의 소리가 장기간의 수련에 의해서 고도의 공력이 깃든 소리였음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1935년 일차 상경한 조몽실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지방에서는 날로 명성을 얻어 나갔다고 한다.
1940년에는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나 부진하였고, 1947년 국극협단에 입단한 후 막간에 그의 장기인 「심청가」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설움이 많았던 그는 늘 상심해 있었고, 1949년 섣달 그믐날 술에 취하여 울면서 밤늦도록 「심청가」를 부르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조몽실이 어느 때 정읍 예기조합의 소리 선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몽실이 일제시대에 정읍에 와서 있었다는 것만은 많은 사람이 증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읍권번/예기조합이 그만큼 폭넓게 소리꾼들을 불러 활용하였다는 징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
이기권
이기권은 1905년 옥구군 임피면 영창리에서 태어났다.
이기권은 서편제 소리의 대명창이었던 이날치의 후예라고 한다.
이기권은 정정렬로부터 판소리 5가와 숙영낭자전을 이수하여 정정렬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나, 초대받아 가서 소리를 하는 전통적인 공연방식을 고집하면서 지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성량이 작아서 무대소리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기교와 공력이 뛰어나서 방안 소리에는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이기권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대금, 양금, 북 등에도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목소리가 고와서 "낮에는 꾀꼬리가 울고, 밤에는 이기권이 운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기권은 해방을 전후해서 정읍, 군산, 익산 등지에서 소리 선생을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중견 소리꾼 치고 이기권에게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할 만큼 전북 판소리에 끼친 그의 영향은 대단한 바 있다.
그래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남에 박동실, 북에 이기권'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박동실과 쌍벽을 이루었던 사람이었다.
이기권의 제자로는 판소리에 홍정택, 강종철, 김원술, 성운선, 최난수, 이일주 등이 있고, 북에 홍용호가 있다.
특히 성운선은 이기권이 정읍 예기조합 소리 선생으로 있을 때 그에게 배운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기권의 소릿제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에 있다.
홍정택이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이기권의 소릿제를 대표하고 있으나, 본래의 소리를 원형대로 모두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제 이기원의 소리는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역사 속의 소리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기권은 1951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운학
이운학은 옥구 출신으로 이기권의 조카이며, 홍정택, 홍용호, 강종철 등과 함께 이기권에게 배워 소리를 했는데, 목구성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발발성 즉, 소리할 때 지나치게 떠는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운학은 특히 「춘향가」를 잘했다고 한다.
정읍, 익산 등지의 국악원에서 소리 선생을 했으며, 1915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죽은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김준섭
김준섭은 1913년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처음 공창식에게 「심청가」를 배웠으며, 그후 김정문의 문하에서「흥보가」, 「수궁가」, 「춘향가」, 「적벽가」를 익힌 뒤 오랜 독공을 통하여 판소리 명창으로 완성되었다.
목은 거칠고 탁한 소리인 수리성으로 성량이 좀 부족한 편이며, 상청이 부족하였으나 조용한 좌석에서는 뛰어난 공력과 기교로 청중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김준섭은 특히「심청가」에 뛰어났었다고 한다.
김준섭은 조선성악연구회에도 참여하여 당시 5명창들의 기량을 보고 익혔으며, 후에 동일창극단에서 심봉사 역할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해방 후 국극사, 국악사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60년 이후에는 전주에 머물며 활동했었다고 한다.
전주에서 「심청가」로 이름을 날리며 활동하던 그는, 불행히도 가까이 했던 아편의 폐해로 1968년 타계하고 말았다. 지금도 전주 부근의 노인들은 김준섭의 「심청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신영채
신영채는 1907년 부안 태생이라고도 하고, 정읍군 칠보면 석탄리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세가 적빈하여 유명한 대가에게 배우지 못하고, 처음에는 무명의 소리꾼에게 귀동냥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5세 때부터 엿장수를 하게 되어 엿을 팔면서 돌아다니다가, 19세 되던 해에 지난날의 명창 전도선이, 소리조로 엿을 사라고 외치는 신영채의 소리를 듣고 불러들여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신영채를 가르쳤다는 전도선이라는 명창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생전의 신영채를 자주 접촉했던 김원술, 홍용호, 송영주 등은 신영채가 전도성에게 배웠다고 했다.
특히 김원술은 신영채가 전도성에게 소리를 배우러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런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전도성이 혹 전도선이라는 소리꾼에게 처음에는 배웠을지 모르나, 자신의 소리를 완성시킨 것은 전도성에게 소리를 배운 후였음에 틀림없다.
신영채는 1938년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1940년 이동백, 박녹주, 조몽실 등과 조선음악단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또 신영채는 정읍 예기조합 시절의 대표적인 소리 선생이기도 했다.
신영채는 「적벽가」와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는데, 특히 그의 귀곡성과 아롱성은 신기(神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한때 신영채를 좋아하여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던 김성수는, 깊은 밤에 신영채가 '귀곡성'을 내면서 소리를 하면 무서운 마음이 왈칵 들어 사람들이 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신영채는 성량이 작아서 무대소리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방안 소리에는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어서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던 임방울마저도 같이 소리하기를 꺼렸다고 했다.
그의 소리는 처음에는 사뿐사뿐 가볍게 엮어가다가, 갑자기 공력을 들여 갖은 기교를 다 부리는 창법을 구사했는데, 그 기교에는 누구든 넋을 잃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신영채는 당시 많은 소리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편에 중독이 되어 말년을 비참하게 보냈다고 한다.
신영채의 말년 행적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김성수는, 신영채가 1955년 경 부안군 백산면 월산리에서 죽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영채의 비참한 생활을 보다 못한 월산리의 청년들이 약간의 전답을 마련해 주면서 그곳에서 살도록 했으나,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신영채는 매우 불우했던 소리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살아야 했던 시기가 민족사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던 점을 상기할 때, 신영채의 불행을 개인만의 것으로 돌려버릴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영채가 그 흔한 음반 한 장 낼 수 없었던 이유도 그의 전성기가 해방 전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