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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예기조합에서 배운 사람들

정읍예기조합에서 배운 사람들

임옥돌

임옥돌은 1902년 전남 담양 출신으로, 김정문에게 5년여 가르침을 받은 뒤 오랜 독공으로 자신의 소리를 완성한 사람이다.
향곡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실력을 갖춘 대가였다고 한다. 임옥돌은 정읍 예기조합이 정읍 국악원으로 개칭되고, 권일상이 국악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처음 맞이한 선생인데, 「흥보가」중에서 흥보 박 타는 대목을 출중하게 잘 불렀다고 한다.
임옥돌은 1947년에 죽었다고 한다.

김성수

김성수의 본명은 김이수이며, 1929년 전라남도 법성포 장수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곧 가족이 이사하여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에서 자랐다.
김성수의 집안은 음악과 밀접한 인연이 있어서, 조부는 대금의 명인이었고, 부친 김용달도 자작으로 소리를 하여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고 한다.

집안의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던 김성수는 해방 직후 박동실, 조상선, 공기남 등의 협률사를 따라나서게 된다.
또 한때는 임방울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김성수가 본격적인 소리 수업에 임한것은 스물네 살 때로서, 당시 고창 흥덕면 후포리에 살고 있던 김토산을 만나고부터이다.
김토산은 이날치 계통의 소리를 했는데, 김성수는 김토산으로부터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등을 배웠다.
수업을 마친 김성수는 다시 2년여 동안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서 독공을 했다. 독공을 마친 김성수는 스물일곱 살 때 정읍국악원 소리 선생이 되었다.
김성수는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된 이후 생활의 터전을 정읍으로 삼고 17년간을 정읍에서 살았다. 정읍 시절에는 김연수가 사설을 정리하는 동안 시중을 들며 김연수의 소리를 귀담아 듣기도 했다.
1972년 김제로 이사한 김성수는 심기일전하여 수련을 하는 한편 각종 판소리 경연대회에도 참가하여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남원 명창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다.

1989년에 여수로 옮겨 사설 국악원을 운영하던 김성수는 그 자신의 독특한 소리를 발견하고 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신나라 레코드에 의해 「흥보가」를 취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수는 음반 취입 이후 일 주일만에 허리와 목을 크게 다쳐 전신마비의 상태로 김제에 있는 아들 집에 머물고 있으나, 이제 소리꾼으로서의 생명은 끝나고 말았다.

김성수의 소리는 성량이 작아 무대소리에는 적합하지 않으나, 목구성이 좋고 즉흥성이 뛰어난 기교를 구사하기 때문에 방안소리에는 출중한 기량을 보였다.
김성수가 판소리가 거의 사멸지경에 이른 시대를 살면서, 진화의 꼬리처럼 남은 몇몇 판소리 애호가를 상대로 소리를 팔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출중한 그의 소리 기량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홍정택

홍정택은 1921년 전북 부안읍 신흥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웅표이다.
14세 때 부안에 들른 임방울, 전일도, 조몽실, 이중선 등의 협률사를 따라나선 것이 판소리 수업의 발단이 되었다.
5년여의 협률사 생활 끝에 변성기가 되어 소리를 못하게 되었으나, 곧 이기권을 찾아가 부안 월명사에서 이운학, 강종철, 홍용호 등과 5개월여의 공부 끝에 성대를 회복했다.
그 후 이기권을 수종하면서 소리를 익혔다. 이기권이 죽자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 들어가 한동안 창극을 하면서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여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목이 우렁찬 데다가 고와서 홍방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목이 상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는 군산국악원을 비롯하여 정읍, 대전, 대구, 논산 국악원 창악 강사를 거쳐 전주에 정착한 후, 줄곧 전주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해 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0년에 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수궁가」로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6년부터는 신설 개원한 전북특별자치도 도립국악원 판소리부 교수로 있었으며, 1991년 정년퇴임한 뒤에는 전주 시내에 판소리 연구소를 내고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홍정택은 이기권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홍정택의 판소리는 대체로 김연수의 사설을 채용하면서 이기권제로 부르고 있다.
이기권에게 배운 사설을 잊어버려서 부득이 김연수의 사설로 때웠으나, 곡조는 이기권의 것을 살려서 부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홍정택의 판소리는 이기권의 판소리를 그 음악적 특성에서만 계승하고 있는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홍정택은 최승희, 조소녀, 전정민, 조영자, 윤소인, 김소영, 강점례 등의 제자를 두었으나, 홍정택의 소리를 완전하게 계승한 사람은 없으며, 현재 이수자들을 두고 있다.

공대일

공대일은 1910년 전남 화순 태생이며, 박동실에게 15세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본래 성음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한 데다가 상청마저 짧아 오랜 수련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주로 광주에서 국악원을 운영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뒤늦게 인정을 받아 전라남도 문화재가 되었다.
공대일의 장기는 「흥보가」였는데, 1989년에 죽었다.

안기선

안기선은 전라남도 송정리 출신으로, 요절한 명창 안향련의 부친이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타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서동순

서동순은 정읍 태인 사람이며, 대가로부터 전통 있는 소리를 배운 바는 없으나, 스스로 소리를 익혀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다른 사항은 알려진 바가 없다.

김흥남

김흥남은 목포 출신으로 생존하면 70여 세가 되는데, 1979년 경부터 5년 동안이나 정읍국악원에 있었다고 한다.
보성소리를 했으며, 정읍에서 목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시립국악원 원장을 맡아 하다가 6-7년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최광렬

최광렬은 1913년 전남 장성 출신으로, 25세 때 고창으로 이사를 와서 고창에서 살았다.
최광렬은 일곱 살 때 구례로 가서 진외가로 친척이 되는 송만갑에게 다섯 달 동안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스물 살 때는 고창의 김영근에게서 가야금 병창을 배웠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전남 장성에 살던 오태석의 제자 조영학에게 가야금병창, 단가, 고사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최광렬은 판소리 도막소리를 했으며, 가야금 병창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가야금 병창은 즉흥적인 대목이 매우 많아 비고정 선율을 보였다고 한다.
최광렬의 판소리는 명창의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광렬은 정읍뿐만 아니라 이리국악원에서도 있었다고 하는데, 십여 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박홍남

박홍남은 1922년 전북 고창군 성내면 출신으로, 현재 부여에 살고 있는데, 충청남도 문화재이다.
주로 민요를 했으며, 판소리는 대가의 소리를 배운 게 아니고 자득한 것으로 별 게 없다고 한다.

한승호

한승호는 1924년 광주 금남동에서 명창 한성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성태는 서편제 명창 김채만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한승호가 아홉 살 때 타계하였으므로 부친의 대를 잇지는 못하였다.
한승호는 김채만의 수제자인 박종원으로부터 소리를 배웠고, 1937년에 상경하여 송만갑에게 다시 소리를 재수하였으며, 이동백, 정정렬 등을 수종하면서 판소리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한승호의 목은 수리성으로 성량이 풍부하여, 아구성과 혀재침을 특기로 삼고 있다.
한승호는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를 잘하는데, 박종원에게 배운 서편제「적벽가」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최난수

최난수는 1931년 전북 임실군 옥정리에서 태어났으나, 곧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에서 성장하였다.
열두 살 때 이리 국악원에 있던 이기원에게 찾아간 것이 판소리 수업의 시발이 되었다.
스물 살 때에 박초월을 찾아가「수궁가」와「흥보가」, 「춘향가」를 배웠으며, 여성단체 생활도 하였다.
1976년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을 시작으로 군산, 김제국악원을 거쳐 현재는 군산에서 사설 국악원을 운영하고 있다.
1980년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1981년 「수궁가」, 1982년「흥보가」 발표회를 국립극장에서 연이어 가짐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널리 자랑하게 되었다.
최난수의 제자로는 강광례, 김명신, 강영금 등이 있는데, 강광례는 광주 남도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이미 명창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있다.

임준옥

임준옥은 1928년 광주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임한기이다.
처음에는 이기권, 장표준, 김시준 등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나 별로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임방울을 만나 같이 활동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이루어가게 된다.

1957년에는 박녹주의 국극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60년부터 영광군 봉전사에서 독공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게 된다.
독공을 마치고 잠시 김연수창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중단하고 순천, 이리, 벌교국악원에서 소리선생을 하다가 1980년 정읍국악원으로 옮겨, 거기서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리선생으로 있었다.

임준옥은 가장 충실한 임방울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공력이 대단한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리 실력과 국악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었다.

성옥란

성옥란은 임준옥의 부인이며, 본명은 춘엽이다.
1925년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나 11세부터 3년 동안 광주에서 박동실의 동생인 박영실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장판개, 김연수, 임방울에게도 배운 바 있다.
남원 권번, 임방울 단체, 박후성 단체, 최찬식의 단체에서 창극을 하다, 26세 때 중앙창극단에서 임준옥을 만났다.
임준옥과 결혼한 성옥란은 소리를 중단하고 가정생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임준옥이 죽자 정읍국악원에서 1년여 소리를 하였으나 그것도 그만두고, 지금은 정읍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성옥란은 오래 소리를 하지 않았었고, 이전에도 주로 창극 소리만을 했기 때문에 소리 기량은 별다른 게 없다는 게 중평이다.

김명신

김명신의 본명은 연임이며, 1940년 전남 화순군 춘양면 변천리에서 4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11살 되던 해에 그 동안 다니던 춘양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광주로 애기 담살이를 갔는데, 그 집이 국악과 관련이 있던 집이어서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리에 입문하게 된 동기도 소리를 하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김명신은 철저하게 가난했던 한국적 풍토가 만들어낸 한국적 소리꾼이라 할 것이다.

맨 처음 광주 민속예술학원에서 오수암에게 단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정광수에게 4년간 「수궁가」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25세 때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가정일에만 몰두하다가, 1980년 임준옥이 정읍국악원으로 오자 다시 소리를 시작하여, 임준옥에게 「수궁가」를 다시 배웠고, 김제에 있던 최난수에게 4년간「흥보가」와「수궁가」를 배웠다.
1985년부터는 오정숙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를 이수하였고, 현재 「적벽가」를 이수하는 중에있다.
이 「적벽가」를 완전히 이수하게 되면 김명신은 여자로서는 드물게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할 수 있게 된다.

김명신은 목이 좀 센 편이며 발발성이 가끔 튀어나오지만, 힘이 좋고 성량이 풍부하여 소리가 힘찬 느낌을 준다.
그동안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남원 명창대회에서 각각 두 번씩 입상한 바 있다.
1988년에는 8개월 동안 정읍국악원 강사를 맡았었으나 지금은 그만두고 사설 국악원을 운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각종 어린이 판소리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강광례

강광례는 1933년 전남 강진군 병영면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6·25에 참전하여 전사하자 살길이 막막하여 별님창극단을 따라나선 것이 판소리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되었다.
창극단을 그만두고 전주로 온 강광례는 당시 전동국악원에서 김원술과 김동준에게 소리를 배우게 되면서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의 길에 들어선다.
남원과 정읍을 오가며 김용운, 김흥남에게도 소리를 배우던 강광례는 한때 5년여 소리를 그만두었다가, 1979년 최난수에게 「수궁가」와「흥보가」를 배우면서 다시 판소리를 시작하였다.
본래 목구성이 좋은 데다가 지극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1987년 남원 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에 입상하였고, 이어 1988년에는 광주 남도예술제에서 마침내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1989년 김명신의 뒤를 이어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되었고, 판소리 보존의 정읍 지부를 맡고 있기도 했다. 현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어 앞날이 기대된다.

박봉남

박봉남은 판소리로 정읍국악원에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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