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伽倻琴]
가야금은 삼국통일무렵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가얏고가 원래 이름이다. 가얏고라는 이름은 가야국의 '가야'와 현악기의 옛말(고)의 합성어이다. 신라 통일 이전에 가얏고가 있었음을 증명할수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1975년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토기 장경호의 목부분에 새겨진 주악도에 의해서 증명된다. 오동나무 울림판에 명주실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각 줄마다 안족(雁足:기러기 발모양이라 하여)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가야금의 종류에는 풍류가야금과 산조가야금으로 구분되는데 풍류가야금은 법금 또는 정악 가야금이라고 한다. 풍류가야금은 영산회상, 평조회상, 가곡, 여민락 등을 연주하고 산조가야금은 민요반주, 산조, 시나위, 무용반주음악 등을 연주할 때 사용된다. 12줄로 된 가야금은 거문고의 음색이 웅장하고 남성적인데 비해 조금 가냘픈 음색으로 여성적이다. 현재 가야금은 전통음악은 물론 새로 창작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로 또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로 쓰이고 있다.
거문고
거문고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나라에서 칠현금을 보내왔으나 고구려 제이상(第二相)으로 있던 왕산악이 그 본모양은 그대로 두고 제도를 많이 고치고 백곡을 지어 연주를 할때 검은 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였는데, 후자에는 학자를 떼어 단지 현금(玄琴)이라고만 한다. 거문고의 고고학적 자료는 황해도 안악고분(安岳古墳)과 만주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벽화가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여지고 그후 거문고는 통일신라 이후 신라에 전해져 신라사람 옥보고(玉寶高)의 손을 거쳐 귀금(貴金),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극종(克宗) 이후로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서 만든 울림통 위에 6줄을 명주실로 만들어 걸고 3줄은 열여섯개의 괘 위에, 3줄은 세 개의 안족 위에 얹어 놓고 술대로 밀거나 뜯어서 연주한다. 그 줄마다 이름이 있는것이 가야금과 조금 다르다. 연주자쪽의 줄에서부터 첫째줄을 문현(文絃)이라고 하고, 둘째줄은 유현(遊絃), 셋째줄은 대현(大絃), 넷째줄은 괘상청, 다섯째줄은 기괘청, 여섯째줄은 무현(武絃)이라고 하고 대나무로 만든 술대로 줄을 튕겨서 연주한다. 거문고의 음색은 매우 남성적이며 가야금과 달리 정악과 민속악을 연주할 때 악기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악기로 조율만 다시 하여 연주한다.
해금 [奚琴]
찰현악기에 속하는 해금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본토악기는 아니고 동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들어와 당악과 향악과 함께 쓰였고 악학궤범 시절에는 향악에만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해금은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8음 즉, 악기를 만드는 8가지 재료를 다 써서 만든다. 해금은 울림통에 연결된 2현 사이에 말총 활대가 끼어있다. 울림통은 대나무, 현은 명주실을 꼬아 만든다. 활대의 말총으로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낸다. 안줄과 바깥줄에 음정관계는 완 5도에 가깝고 관악합주, 관현합주, 무용반주, 산조, 민요, 줄풍류등 다양하게 쓰인다.
월금 [月琴]
월금은 공명통이 이름대로 보름달처럼 생겼다. 중국 진(晋)나라 사람 완함(阮咸)이 만들었다고 하여 완함이라고도 한다. 월금은 통구 삼실총과 제17호분 등 고구려 고분벽화와 금동용봉봉래산향로 등 백제 유물에 등장하다가 비파가 유입되자 사라졌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등장한다. 『악학궤범』의 월금에는 4현과 13개의 괘가 있으며, 향악에 쓰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양금 [洋琴, 揚琴]
양금은 원래 서양금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구라철사금(區邏鐵絲琴), 구라절현금, 천금, 번금 등으로 불린다. 양금은 중세 이후 구라파에서 성행하던 철현악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통해 영조 초에 들어왔다. 양금은 채로 쳐서 연주하는데 서양이나 중국에서는 양채를 사용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이 완만하고 화음을 사용하지 않기때문에 거의 외채만을 사용한다. 사다리꼴의 판면 위에 긴 괘를 두개 세우고 그 위에 4줄의 철줄을 한벌로 하여 14벌, 즉, 56선이 있으며 대로 깎아 만든 채로 줄을 찾아 친다. 각 줄은 곡철이라고 부르는 시계 태엽을 감는 도구와 같은것으로 음을 고르는데, 먼저 오른쪽 괘의 왼편의 제 5현을 임종(林鐘)에 맞추고 다음은 옥타브 관계를 이용하여 맞추어 나간다. 금속성의 맑은 음색을 가지고있으나 거문고, 가야금과 같은 농현(弄)이 불가능하므로 독주악기로는 쓰이지 않고 실내악이나 관현악, 정악, 줄풍류 연주시 사용한다.
아쟁 [牙箏]
아쟁은 '고려사' 악지 당악기조에 전하고 고려때에는 당악에만 편성되었으나 조선초기 이후에는 당악과 향악과 함께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온것으로 오동나무판 위에 7줄의 명주실을 안족으로 받쳐놓고 껍질을 벗긴 개나리 가지에 송진을 칠하여 줄을 문질러서 소리낸다. 현재는 대아쟁과 소아쟁으로 구분하며 대아쟁은 주로 풍류음악에 사용되고 소아쟁은 산조, 무용반주, 민요반주 등으로 사용된다. 대아쟁은 국악기 중에서 가장 낮은 음정을 갖고 합주음악의 저음을 담당하며, 소아쟁은 대아쟁을 축소하여 만든것으로 산조아쟁이라 부른다. 아쟁은 울림통위에 7현이 안족으로 받쳐있는데, 대아쟁은 7현이 원칙이며 소아쟁은 8현을 쓴다.
당비파 [唐琵琶]
향비파와 마찬가지로 둥그스름한 공명통에 머리부분이 흰 곡경(曲頸)을 지닌 4현의 악기이다. 이 악기의 우입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으로는 [고려사]의 문종 30년 조(條), 즉 1076년의 기록이 있는데 이보다 앞선 감은사유지(感恩寺遺趾) 및 문경(聞慶) 봉암사(鳳岩寺)의 지증대사숙조탑신 등의 유적에 그림이 보이고있어,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유입된것으로 보고있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주로 당악(唐樂)에만 사용되어왔으나 조선 이후는 향악곡(鄕樂曲)도 함께 연주하였다. 이 악기는 한때 매우 성행하여 조선 성종때는 영인은 물론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배우기위한 기초적 악기로 연주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악공을 취재(取才)할때도 이 악기로 과시(科試)하였다고 한다.
향비파 [鄕琵琶]
동그스름한 공명통에 머리부분이 곧은 경(頸), 즉 직경(直頸)을 지닌 5현의 악기이다. 이 '5현'은 향비파와 이명동물(異名同物)인 악기로 고구려 서역때 서역, 즉 구자(龜玆)로부터 수입하여 사용하고있었다, 그러던것이 신라에 전해져 신라 삼현삼죽(三絃三竹)에 편성되어 사용되다가 당시 전해진 당비파와 구분하기 위하여 향비파라고 따로 이름한것이다. 악기의 제도(制度)는 거문고와 같이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를 사용하고있으며 대모(玳瑁)를 붙여 술대로 연주한다. 술대를 쥐는 방법에 관해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거문고와 같이 자(自) 모양으로 쥔다고 하였으나 손모양은 옆으로 긁어서 소리내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때 술대를 쓰지않기도 하였다. 이 악기는 1930년대까지만 하여도 거문고를 전공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겸공으로 연주하였으나 언제부터인지 연주되지 않아 현재는 악기만이 전해지고있는 실정이다.
금 [琴]
가야금은 삼국통일무렵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가얏고가 원래 이름이다. 가얏고라는 이름은 가야국의 '가야'와 현악기의 옛말(고)의 합성어이다. 신라 통일 이전에 가얏고가 있었음을 증명할수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1975년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토기 장경호의 목부분에 새겨진 주악도에 의해서 증명된다. 오동나무 울림판에 명주실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각 줄마다 안족(雁足:기러기 발모양이라 하여)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가야금의 종류에는 풍류가야금과 산조가야금으로 구분되는데 풍류가야금은 법금 또는 정악 가야금이라고 한다. 풍류가야금은 영산회상, 평조회상, 가곡, 여민락 등을 연주하고 산조가야금은 민요반주, 산조, 시나위, 무용반주음악 등을 연주할 때 사용된다. 12줄로 된 가야금은 거문고의 음색이 웅장하고 남성적인데 비해 조금 가냘픈 음색으로 여성적이다. 현재 가야금은 전통음악은 물론 새로 창작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로 또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