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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전봉준장군

영원한 민족․민중 지도자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전봉준은 오늘날 학생들이 꼽는 역사 인물 중에 열 명 안에 든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를 역적으로 몰아가지 않고 개혁가 혁명가로 평가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변혁의 상징이 되고 있다.

주체 역량과 동력이 있다고 하여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조직화하고 폭발적인 분출로 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전봉준. 예전에 아무리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려 해도 틈을 비집고 끼어들었다. 특히 유신 이후 그의 초상화는 끊임없이 민중의 눈을 현란케 했다. 우리는 영웅사관을 배제하면서도 영웅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상놈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너무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창혁은 훈장질로 입에 풀칠을 한 평범한 위인이었으나 아들을 잘 둔 탓인지 자주 역사에 이름이 오른다.

전봉준의 출생지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는데, 천안 전씨들이 여기저기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고창군 덕정면 당촌마을에 전봉준의 어릴 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촌 전씨’로도 불리는 천안 전씨 20여 호가 모여 살던 곳이다. 이들 전씨들은 상인도, 그렇다고 떵떵거리는 양반도 아니었다. 그저 시골의 평민으로 행세하는 신분층이었다. 이 당촌마을 뒤 언덕에는 전씨들의 조상묘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 입구에 서당이 있었는데 그 훈장이 바로 전창혁이었다 하며, 전봉준이 열 살을 조금 넘긴 무렵 일가는 이곳을 떠났다. 훈장으로야 입에 풀칠이나 하는 생활수준이었을 테니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으리라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있다.

그 뒤 전창혁은 태인 동곡리(지금의 정읍군 산외면)로 가서 살았다는데 동곡리 지금실은 동학 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또 태인 황새뫼(지금의 정읍군 감곡면)에서도 살았다는데 이 마을은 그의 아내와 성씨가 같은 언양 김씨의 집성촌인 금구현 거야 마을과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동학 농민군의 큰 지도자 김덕명의 근거지인 원평과 1km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전봉준은 황새뫼의 건넛마을인 종정(지금의 김제군 봉남면)마을의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면서 의식 있는 농촌 지식인으로 유랑 생활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으로 고부의 조소리로 이사를 했다.

고부 사람들이 조병갑의 부정에 항의해 대대적인 집회를 갖고 등소(等訴, 수령에게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건의하는 일)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장두(狀頭, 대표)에 전창혁, 김도삼, 정일서 등 세 사람을 뽑고 그 수장두(우두머리)로 전창혁을 내세운다.

등소를 받아 든 조병갑은 세 사람을 ‘난민’이라는 이름을 들씌워 잡아 가두고 다른 농민들은 몽둥이질을 하여 쫓아 보낸다. 세 사람은 전주 감영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고부 감옥으로 돌아오는데, 이들을 ‘엄하게 문초하라’는 조처가 내려진다. 세 사람은 또 모진 난장질을 당했다.

전창혁은 곧 1893년 6월 등소 단계에서 매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그 시기는 전봉준이 이듬해 초기 전투에서 상복을 입고 다녔다거나, 그가 전주에서 퇴각한 뒤 아버지의 소상을 6월 중에 치렀다는 설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전창혁이 심한 매를 맞고 쫓겨나 저 유명한 사발통문의 근원지인 고부 죽산 마을에 와서 죽었다는 설에서도 시절은 여름이다.

아무튼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를 두었고 그 영향을 여러모로 받았던 것이다. 전봉준은 유민처럼 떠도는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살았다. 비록 그가 어릴 적 백구시를 지었다고 하나 개구쟁이로 더욱 이름을 떨쳤던 것 같다. 10대 초반 당촌마을 앞에는 인내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김씨 성을 가진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정초에 두 동네 아이들이 패싸움을 벌일 적에 전봉준이 늘 앞장을 섰다고 한다.

전봉준이 장성해서 정약용의 국가제도 개혁방안을 담은 <경세유표>를 읽었다고도 하고 서울로 올라가 몇 년 동안 살면서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유랑생활 속에서 사귄 동무나 선배, 곧 김덕명․김개남․손화중 등이 함께 거사했고, 또 그가 알고 지내던 손여옥․차치구․정백현 등을 끌어들였다.

그는 늦어도 30대 초반에 일대 봉기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들이를 할 적에 수행원 여럿을 거느리고 밤에 친지의 집에 찾아들기 일쑤요, 그의 일행에게 밥을 지어줄 적에도 그 숫자를 모르게 하였다고 하며, 수행원의 밥그릇을 나귀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장성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적에 훈장 노릇은 물론 때로 풍수쟁이, 약장수 등을 했다 하며 때로 날도 잡아주고 편지도 대필했다는 것이다. 그런 속에 가렴주구와 민중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더욱 봉기의 조직을 넓혀갔다.

그가 일본 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을 적에 자신은 논 세 두락을 부치므로 하등 빼앗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너는 피해가 없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소요를 일으켰느냐”고 물으니 그는 “일신의 피해 때문에 기포한다면 어찌 남자의 일이겠느냐? 중민이 원통해 하고 한탄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전봉준 공초’).

그가 동학에 든 것은 1890년대 초였다. 그는 접주라 했고 동학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으나 포덕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동학의 신비성, 주술성과 조직을 가장 잘 이용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봉기했다. 그는 민중의 동력을 끌어낸 제일의 공로자이다. 고부봉기 이후 많은 포고문․격문․행동강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반봉건․반외세의 지향을 뚜렷이 보여주었고, 민심을 얻는 농민군의 행동지침을 내렸다. 오늘날의 안목으로는 물론 그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적어도 1차 봉기 때에는 전략․전술가로 나무랄 데가 없다. 집강소 기간 호남의 3분의 2 이상이 그의 지휘 아래 있었고, 부분적이나마 경상도․충청도에도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충청도 지역의 당시 기록에 전봉준은 한결같이 ‘수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7월 15일 남원대회 이후 농민군 지도부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하나는 집강소 통치에 감사(정부의 대행)의 공인을 받는 것이었는데, 김개남은 이를 반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전봉준은 감사 김학진의 협조를 얻어 반봉건운동을 추진했다. 또 하나는 경복궁 쿠데타(7월 23일)와 개화정권을 반대하고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은 일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반일․반개화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에서는 미묘한 이견을 보인 것 같다.

한편 김개남은 수령․양반․토호의 징치에 강도를 더했고, 전봉준은 유화책으로 회유와 설득을 통해 풀어나가려 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의 세 거두, 곧 김개남을 급진파, 손화중을 온건파, 전봉준을 중도파로 구분할 수 있었다.

공주대회전의 주력 농민군은 어디까지나 전봉준이 이끌었다. 공주의 패전은 그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겼다. 그는 이 2차 봉기를 9월에 단행한 것은 곡식이 여물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때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평양에서 크게 깨뜨리고 총부리를 농민군에게 집중적으로 겨눌 수 있었으며, 게다가 개화 정권의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시기였다.

공주대회전은 일본군에게 많은 시간을 주어 북쪽과 경상도․충청도 해안 세력의 합류를 차단당했고, 또 남접의 일부 이탈과 북접의 연합이 늦어진 속에 전면 대결을 벌여 일본의 신무기와 정면으로 맞섰다. 날씨가 추운 자연조건에서 장기전을 벌였으나 분산전과 유격전은 시도하지 않았다.

이때의 전략․전술은 논란거리를 제공할 만했다. 그는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반일의 의리를 따져 지원을 요청했고,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앞잡이 또는 일본군에 협조하는 개화정권의 군대와 구실아치, 보부상들에게 애국의 의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세상 인심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흔히 동양의 역사관은 이를 ‘시운’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전봉준은 원평․태인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몸을 뺐다. 그를 입암산성장이나 백양사의 중들도 고발하지 않았는데, 옛 부하 김경천의 변절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불과 20리 지점에 숨어 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는 말도 있다. 처음 잡힐 적에 그는 몽둥이인지 칼인지 다리를 크게 얻어맞아 다쳤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한다. 이런 몸으로도 그의 기개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나주 초토영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끌려왔다. 그는 용케 일본군에게 끌려간 탓으로 재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밝힐 기회를 얻었다.

그는 신중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기질은 아주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에서 서울로 잡혀올 적에 그의 행동은 이렇게 전한다.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길을 오는 동안 죽력고(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와 인삼․미음을 달라고 하여 먹으면서 행동거지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꾸짖기를 ‘내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너희들이 어찌 나를 함부로 다루느냐’하였다. 잡아가는 자들이 이를 보고 ‘예예’하며 잘 모셨다”(<오하기문> 3필).

전봉준은 많은 신문을 받은 끝에 판결을 받았는데, 판결문의 주문은 그가 농민전쟁을 일으키고 동도대장이 되어 활동한 사실과 전주성을 점령한 뒤 화해를 한 조건과 일본인을 축출키 위해 2차 봉기를 주도하여 공주전투를 벌인 일 등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끝에 “함께 모의를 꾸민 몇 사람과 의논하고 각기 옷을 바꾸어 입고서 가만히 경성으로 들어가 정세를 알고자하여, 피고는 장사꾼 맨도리(맨드리, 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를 하고 홑몸으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태인을 떠나 전라도 순창을 지날 새 민병한테 잡힌 것이니라”라 기재하여 전봉준의 마지막 행동을 제시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말기에 이루어진 법전)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 보면 “군복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하여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이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 언도를 받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4명은 판결이 난 날인 3월 29일,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은 모두 5명뿐이었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는 모조리 참형을 가하여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이런 효수형이 너무 참혹하다고 하여 갑오개혁 때 철폐하였다. 그래서 이들 다섯 명에게 처음으로 교수형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형을 즉각 집행한 조치에는 중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들 5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러니까 사형선고와 사형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여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한 것이다.

아무튼 선고가 끝난 뒤 법정은 소란스러웠다. 특히 일본인 기자들이 더 들떠 있었다. 선고 법정에 판관으로 입회하였던 재판관인 장박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전봉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장 : 나는 법관의 몸으로 죄인과 한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목숨이 아까우냐“
전 : 국법을 적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장박은 “오늘의 죽음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네가 전라도에서 한번 일어나자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도 크게 개혁되었다.
너희가 탐관오리로 지적한 민영준 등도 국법에 처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흔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너희의 죽음은 오늘의 공명한 정사를 촉진한 것이므로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는 1차 농민전쟁으로 청일전쟁이 유발되고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것과 민씨 정권이 타도된 사실을 말하였다. 여기의 “개혁”은 갑오개혁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갑오개혁은 농민군의 요구조항을 참고해 수용하였다. 개화정권은 이를 인정하여 전봉준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다섯 지도자들은 3월 29일 한날에 처형되었는데 이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질척거릴 정도로 내렸다. 전봉준은 “부대시참”이라는 판결문을 듣고 몸을 불끈 일으키면서 “올바른 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누명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죽기 직전에 애국충정을 담아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時來天地皆同力)로 시작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는 또 형을 받을 때 교수대 앞에서 법관이 “가족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간곡하게 권고하자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 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겠다. 어찌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고 재판 관계자들을 준절하게 꾸짖었다 한다. 국가 지도자로서 대의멸친(大義滅親, 큰 의리를 지닌 인물은 가족을 저버리는 것)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다고 전해지나 딸의 후손은 확인된 적이 있으나 아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리하여 천안 전씨 문중에서는 양손(전성준)을 두어 가계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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