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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김개남

강경파의 대명사로 ‘불꽃 삶’ 김개남(金開南, 1853~1894)

김개남은 태인의 토반인 도강 김씨 가문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상두산 아래 깊은 산골마을인 동곡 지금실이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출신 배경을 가진 그가 어떤 경로로 동학에 들고 전봉준과 때로는 절친한 죽마고우, 때로는 라이벌이 되어 농민군 2대 지도자로 군림했던가?

한말의 유학자 매천 황현은 이렇게 쓰고 있다. “도둑들이 처음 고부에서 봉기할 적에 그 괴수는 태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라 좌우도에서 태인접이 으뜸이었다. 전봉준과 김기범(金基範)은 나이가 마흔 살쯤 되었다. 기범의 일가붙이는 대대로 태인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김시풍도 그중의 하나이다. 기범은 사납고 무단(武斷)이 있어 난을 일으킬 적에 여러 일가붙이가 모두 따랐기 때문에 도강 김씨에 스물네 명의 접주가 있었다”(<오하기문>).

김개남의 근거지인 태인에서 가장 농민군이 치열하게 일어났고, 또 그중에서도 도강 김씨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모두 김개남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김개남은 전봉준과 같은 또래로 함께 난을 주도했다는 뜻을 풍기고 있다.

이어 이렇게 쓰고 있다. “김기범은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이 개남(開南)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태인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한 집에서 말 네댓 마리를 길렀으며 총통을 가장 적게 가진 집이 10여 개였다.”

김개남이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꾼 내력과 그의 근거지에 많은 말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음을 쓰고 있다. 남조선 왕국설은 조선후기부터 비기에 등장하는데 이씨 왕조를 반대해 새 왕조를 창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조선 후기 변혁사상의 한 줄기였다.

이처럼 김개남은 봉건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열혈에 찬 행동을 보였고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타협을 모르고 후퇴가 없는 강경파로 꼽혔고 이로인해 더욱 조정과 관가의 압제를 받았다.

그의 내력을 좀 더 살펴보면 김개남은 태인 땅 산외면 지금실에서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그도 어릴 적에 서당에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병서 읽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려 곧잘 장난질을 쳐 말썽꾸러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예전 어린이들은 곧잘 참외서리․닭서리 같은 놀이 아닌 놀이를 벌인다. 그런데 영주(개남의 어릴 적 이름)는 통 크게도 돼지서리를 했다는 것이다. 돼지는 한 집의 살림 밑천이 되는데 돼지를 훔쳐 잡아먹었다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 부모의 애간장을 무척 태웠을 것이다.

그는 자라서 상두재를 넘어 원평과 전주로 넘나들었고, 이때 일가붙이인 전주 영장 김시풍과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이때쯤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고 호걸스러운 사람 그리고 양반이나 벼슬아치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들이었다 한다(김동기의 증언).

이런 그였으니 동학에 입도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 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1890년 초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를 자주 순행하며 포덕에 열중했다. 1891년 최시형은 부안을 거쳐 태인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 찾아갔고 이때 김개남은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 한다.

그 뒤 김개남은 각종 집회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럴 적마다 남접 안에서 강경파로 부상했다. 1893년 봄 원평집회를 전봉준과 함께 주도했고 북접의 서장옥 황하일과 어울렸다. 이런 탓으로 1894년 남접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부안 백산에서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 대장 전봉준 다음의 총관령이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전주에서 화약을 초토사 홍계훈과 맺고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는 전봉준․손화중과 길을 달리했다. 그는 전라좌도 곧 지리산 언저리로 진출했다. 그의 지휘권 아래에 든 지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장수․무주 등지였다.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 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였던 것이다.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번 활개를 친 것이리라.

집강소 시기 갑오개혁에 의해 이들은 일단 제도로는 신분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양반이나 상전들은 이런 제도를 인정치 않으려 했다. 이때 동몽군(童蒙軍)들은 양반집에 딸이 있으면 수건을 문에 걸어놓고 ‘납폐’(納幣)라고 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못 가게 하였다. 이에 딸이 있는 집은 귓속말로 혼약을 맺어 물을 떠 놓고 화촉을 밝혔다. 이것을 ‘3일혼’이라 불렀다.

천민들은 양반이나 사족을 가장 미워하여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네가 양반이냐”고 윽박지르며 갓을 벗겨 찢어버리기도 하고 제 머리에 얹어 쓰고 다니며 횡행했다. 노비로 농민군을 따르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노비들도 주인을 겁주며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강제로 양인 신분을 얻으려 했다. 더러는 그들의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특히 김개남 부대에서 크게 일어났다.

또 지리산을 넘어 안의 함양으로 진출하려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계속해서 금구출신의 청년 지도자인 김인배를 양호대접주의 직함을 주어 순천으로 보내 그곳 농민군을 지휘하게 했다.

김개남은 흥선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현지 수령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으며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전혀 대화를 끊고 상대하지 않았다(흥선대원군과 연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아무튼 김개남은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반봉건운동 탓으로 지금까지 김개남은 핍박을 받고 있다.

9월 2차 봉기가 일어날 적에 그는 전봉준이 공주를 공격할 때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직속 농민군을 이끌고 10월에야 장수․금산․진잠을 거쳐 청주 병영 공격에 나섰다. 그의 청주 병영 공격은 실패했으나 청주 병영의 관군이 공주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는 패전 장수가 되어 회문산의 깊은 산골 종송리(지금의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느티마을에 있는 매부 집으로 몸을 숨겼다. 이 마을의 아랫마을에는 옛 친구 임병찬이 살고 있었다. 임병찬은 아전 출신이나 부호였고 또 선비나 벼슬아치들과 넓은 교유를 트고 있었다. 뒷날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최익현이 쓰시마로 끌려갈 때에 배종해 수발을 들었다.

이런 임병찬에게 김개남이 구명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 있는 곳보다 이곳이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전주 감영에 연락하였는데 감사 이도재는 강화도 수비병의 종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내왔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그런데 이곳은 전봉준이 잡힌 피로리와 불과 20리 쯤 거리에 있다. 두 지도자는 서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각기 이곳으로 왔다고 일부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은 옛 부하, 한 사람은 옛 친구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던 것이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었다.

아무튼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와 전라감사 이도재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김개남은 소리를 치면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비밀 지시를 따른 것이다. 지금 실패한 것은 하늘의 운수일 뿐이다”(오하기문)라고 말했다 한다.

어쨌든 이도재는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현지에서 처형을 했다. 이때의 정경을 두고 황현은 “그를 참형에 처하고 그의 배를 갈라 오장육부를 꺼내 큰 소반에 담아놓으니 보통 사람의 것보다 월등히 컸다. 원수진 사람들이 다투어 그 고기를 씹고 그 고기를 갈라서 죽은 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머리만을 함박지에 담아 대궐에 바쳤다”(오하기문)라고 쓰고 있다.

그를 현지에서 처형한 이유로 대체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김개남의 부하들이 드세어 그를 탈출케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거나 그가 처형한 남원부사 이용헌의 아들 등이 복수하게 해달라는 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도재가 그를 국문해보니 흥선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여 이런 사정을 숨기려 급하게 처형했다는 설이다.

그를 전주 서교장(西敎場)에서 처형하고(주한공사관 기록) 그의 머리는 황현의 기록대로, 서울에서 전시되었다. 지금 황토현기념관에 효수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는 사진은 전봉준이 아니라 김개남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주의 백성들은, 전주 교외 초록바위에서 처형하고 효수하였다고 전하는데 사실과 다르게 보이기는 하나 민간에 떠도는 전설이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잡혀갈 적에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 했노”라고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워했다. 여기에서 나타난 “진”은 김의 전라도식 발음이다.

그리하여 지금 그의 무덤은 없다. 1994년 전주의 뜻 있는 인사들이 덕진공원 안에 돌비를 세우고 그의 행적을 적어 놓았다. 또 그의 후손들이 지금실 고택 밑에 가묘를 조성하고 행적을 적은 묘비를 세워 놓았다.

그런데 그의 효수된 사진이 전해져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사진은 그동안 전봉준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근래 김개남의 것으로 확인되었다.(이이화 주장) 하지만 이 사진에 대한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김개남의 손자 환옥씨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인상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늦게야 돌아올 수 있었다 한다. 옛 집에 돌아오니 논밭과 살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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