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BRAND

최경선

최경선 장군

황토현․광주나주 전투의 선봉장 최경선(崔景善, 1859~1895)

최경선은 초기 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전봉준 휘하의 선봉장이었고 철저히 전봉준의 지시를 따른 부하였다. 그래서 그 위치가 김개남이나 손화중과 달랐다.

전봉준과 한날 처형된 최경선의 판결문은 첫째, 전봉준의 모주(謀主)가 되어 도당을 모아 고부 관아에 들어가 난동을 부리고, 그곳에서 전라 감영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둘째, 정읍 등 여러 고을을 거쳐 전주에 들어가 전투를 벌일 적에 전봉준의 팔다리가 되었고, 셋째, 전봉준이 2차 봉기를 벌일 적에 그 경륜에 참여하여 도당을 모았다고 그의 ‘죄상’을 적고 있다.(동학관련판결문집, 판결선언서 원본)

전봉준의 철저한 협조자로 죽음도 함께 한 최경선은 태인현 서촌면 월촌리(지금의 정읍 북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성룡은 큰 지주였고 그의 조상은 시골에서 대우받을 만한 벼슬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병석’이라는 이름으로 족보에 올라 있다. 원래 이름은 ‘영창’이었으나 뒷날 바꾸어 기재한 듯 하며 활동을 벌일 적에는 자인 ‘경선’으로 널리 통했다. 판결선언서에는 영창(永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어느 때인지 월촌리의 이웃 마을인 주산리로 옮겨가 살았다. 주산리는 태인현 관아가 있는 곳과는 5리, 고부의 말목장터와는 10리, 고부관아와는 30여 리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전봉준보다 네 살 아래였는데 전봉준은 공초에서 5~6년의 친분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했다. 판결문이 말해 주듯 사발통문에도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1893년 11월에 이루어진 사발통문의 명단에는 전봉준의 이름과 함께 최경선의 이름이 뚜렷하게 올라있다. 여기 이름에 김개남 손화중은 빠져 있으니 이로 보아도 전봉준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창의문을 세상에 선포하고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은 그날로 일어났다. 태인 주산리 접주 최경선 집에도 도인으로 건장한 자 3백 명을 모아 가지고 그 밤으로 고부 북면 말목장터 30리를 달려 들어갔다”는 기록(오지영의 <동학사>)은 최경선이 1차 봉기 때 위 세 사람 아래 영솔장이 되었고 그 직책을 다해 신속하게 활동을 전개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영솔장이란 군사를 직접 거느리며 지휘하는 선봉장이다.

여기에서 황토현 전투를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1894년 4월 초 농민군들은 백산에서 연합군 4천여 명을 집결해 주변 고을을 석권했다. 이에 전라 감영에서는 무남영의 군사와 보부상군을 보냈다. 농민군은 부안․태인 등지에 분산해 활동을 벌여서 무남영군을 유인했다.

무남영군과 보부상군 1천 3백여 명은 거들먹거리며 태인․백산을 거쳐 진격해 왔다. 그들은 항상 하는 대로 오는 길에 약탈을 일삼고 보리밭을 짓밟았다. 이에 비해 농민군들은 쓰러진 보리를 세워주기도 하고 노인과 아녀자의 짐을 대신 져 주기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관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서로 함지박에 밥을 담아내 농민군을 먹이는 정성으로 그에 답했다.

농민군은 무남영군과 4월 6일 밤 황토현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일대 승리를 이끌어냈다. 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고, 농민군은 남쪽으로 대장기를 돌렸다. 이것이 관군과 접전을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때 관군의 시체는 황토현 논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시체 주머니에는 약탈한 금은붙이가 가득 들어 있었고 더러 남장을 한 여자도 섞여 있었다 한다. 지금 그 자리에는 황토현기념관과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자리잡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중앙에서 보낸 초토사 홍계훈군을 유인하기 위해 고창․영광․함평을 돌아 장성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뒤늦게 쫓아온 홍계훈의 일부 병력과 전투를 벌여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중앙 군대와 싸워 이긴 두 번째 승리였다. 이를 황룡강 전투라 부른다.

이때 영솔장 최경선의 활동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생질이 바로 황룡강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전주에서 퇴각하여 집강소 활동을 벌일 적에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활동 지역을 달리한다. 나주․광주 일대에서 후방 업무를 맡아본 것이다.

농민군이 통치하던 집강소 기간 전라도의 고을들이 거의 농민군 손아귀에 들어갔는데 나주목만은 처음부터 목사 민종렬과 영장 이원우의 굳건한 방어로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군의 처지로 볼 적에 눈에 박힌 가시였다. 특히 이원우는 최경선 휘하의 농민군 수백 명을 공격하여 참살하고 있었다.

이에 손화중 최경선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 아래 십리 쯤에 진을 쳤다. 이원우는 사람을 시켜 거짓 항복하면서 “나주의 백성들이 성을 지키느라 곤궁해져서 날로 도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오늘 저녁 동쪽 문을 열어놓을 터이니 시각을 어기지 말도록 해주시오”라고 말했다.

최경선이 크게 기뻐하며 새벽에 동문 안 십여 보를 들어가니 “갱도에 빠뜨려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계략에 빠진 줄을 알고 급히 성 바깥으로 물러나왔으나 복병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서 죽은 농민군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최경선은 장성으로 물러나와 전봉준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전봉준은 편지를 내던지며 “각자 자기 직책을 다해야 될 뿐이다. 무슨 까닭으로 먼저 싸움을 거는가? 최경선이 내 말을 듣지 않고 패전했으니 내 도움을 바라지 말라”라고 말했다(황현의 <오하기문>).

이는 전봉준이 최경선을 장수감으로 다듬기 위해서 짐짓 책임을 지운 것이었다. 최경선은 전봉준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랐던 것이다. 뒤에 전봉준은 민종렬의 설득에 나선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준비할 적에 최경선은 광주지방에서 군수전, 군수미 그리고 농민군을 모집하여 전봉준에게 보내주는 일을 맡았다. 전봉준이 삼례의 저막(邸幕)에서 2차 봉기의 작전을 짤 적에 뒤늦게 최경선이 달려왔다. 이때 전봉준은 일본군이 남쪽 바다를 통해 전라도 땅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손화중․최경선을 광주로 보내 이를 지키게 하였다.

당시 광주에 진을 친 최경선은 오권선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나주 공격에 나섰다. 이해 10월 21일에는 최경선이 이끄는 광주의 농민군 7백여 명이 광주 침산에 진을 치고 나팔을 불고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전진했다. 광주의 농민군과 나주의 수성군은 한 식경을 싸웠으나 뚜렷한 승부가 나지 않았다.(이병수의 <금성정의록>)

이후로도 농민군은 나주의 민보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나주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 후 11월 27일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자 잔여 농민군은 광주로 와서 손화중․최경선의 농민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다시 나주 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어 일본군과 관군은 담양을 거쳐 광주로 진격해 왔다. 농민군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최경선은 동복으로 가서 다시 힘을 모아 남평을 차지했다. 이 급보를 받은 나주 초토영에서는 포군 3백 명과 민병을 보냈다. 최경선의 농민군은 능주 쪽으로 빠져나갔다.

최경선은 동복 벽성리에 숨어 있다가 밀고로 잡혔다. 그의 끈질기고 기백에 찬 활동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그는 담양의 일본군 부대에 잡혀 왔다가 전봉준과 함께 나주 감옥에 갇혔다. 여러 번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했던 나주,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으니 통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도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서울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한날에 죽었다.

그의 백형 낙선은 유력 인사였다. 어떤 로비를 벌였는지는 모르나 그의 시체를 꺼내와 태인현 남촌면 유현리에 안장했다. 그리하여 김덕명과 함께 가묘가 아닌 참묘에 사후에나마 편안히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손을 두지 못했고, 그의 아내 정씨만 모진 고생을 하며 일흔여덟 살의 수를 누렸다 한다.

그는 황룡강 전투에서 잃은 생질과 함께 많은 친척과 친구를 동지로 끌어들였다. 지금 그의 고택이 있었던 주산마을에는 그의 흔적이 전혀 없다. 다만 양손인 최명언이 그의 뜻을 잇고 있다.

  • 관리부서동학문화재과/동학선양팀
  • 연락처063-539-692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