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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김덕명 장군

금구 원평의 터주대감 김덕명(金德明, 1845~1895)

김덕명은 농민전쟁이 전개될 당시 60 늙은이였으니 가장 원로급에 속했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열정은 민중의 입을 통해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다.

1892년 전라도 삼례에서 수만 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것, 탐관오리를 제거할 것 따위의 요구를 내걸고 집회를 벌였다. 이것이 동학 교단이 성립된 뒤 최초의 대규모 집단행동이었다. 이때 금구지방(지금의 김제군 금산면)에서 1만여 명이 참여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금구현 원평을 주목하여 이 지방이 동학교도들이 가장 많은 곳임을 고종 임금까지 알고 있으면서 그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어 금구 원평에는 집강소의 대도소가 있기도 했고, 동학농민혁명 때는 이웃 고을인 태인지방과 함께 농민군 주력 부대가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평은 농민전쟁의 중심 지역이 되었는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지도자가 바로 김덕명이다. 김덕명은 언양 김씨였는데 이들 김씨의 세거지(世居地)는 금구현 두류면 거야마을 일대(지금의 김제군 금산면 삼봉리)였다. 이들 김씨는 시골양반 행세를 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김덕명이 태어난 곳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산사 입구의 용계마을이었다.

그의 본 이름은 준상이요 자가 덕명인데, 자를 이름처럼 써온 것은 다른 농민군 지도자와 같다. 호는 용계, 그가 잡힐 적에 살던 곳을 용계동이라 했으니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그리 가난하지 않은 중농 집안에 태어난 탓으로 어릴 때 글을 익혔는데 언제부터인지 고리타분한 경서보다 병법 책을 읽어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가까운 일족인 한 참서(參書)가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벼슬을 사서 세도 부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곧 그 참서는 토호 노릇을 한 것이다. 참서란 허울뿐인 벼슬로 당시 흔히 그랬던 것처럼 세도를 부리려고 돈을 주고 샀을 것이다.

이들 김씨들의 재실이 있는 금구 장흥리의 안정 절골에서 종중회의를 할 때 그는 일족의 이런 짓거리에 분노하여 재떨이와 목침 따위를 던지며 의기를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는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전봉준이나 김개남과 언제부터 안면을 트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상두재라는 고개 하나를 넘으면 김개남의 집이 있었고 또 십리 안의 거리엔 황새마을에서 전봉준이 살았다는 증언이 있으니 이들이 젊을 적부터 서로 알았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

김덕명은 두 지도자보다 10여 년쯤 연상이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의 처가가 언양 김씨여서 전봉준이 한때 그의 집 식객 노릇을 했다는 말도 있다. 전봉준 일가는 이런 인연으로 한때 황새뫼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오른 것은 고부․무장 봉기에 이은 백산의 대집결 때부터이다. 백산에 각지의 농민군 수만 명이 모여들 적에 금구에서는 농민군 두령으로 끝까지 크게 활약한 송태섭․유공만․김인배․김봉득 등이 참여했고, 김덕명은 총대장 전봉준과 총관령 손화중․김개남의 총참모가 되어 젊은 세 지도자를 도왔다.

아무튼 그는 참모의 직책을 가지고 황토현전투와 장성 황룡촌전투 그리고 전주 점령까지 행동을 같이 했다. 그는 철저하게 후배 전봉준의 협조자가 된다.

1차 봉기가 전주화약으로 매듭짓고 농민군이 전주에서 퇴각한 뒤 농민군의 자치, 즉 집강소 통치가 시작된다. 이때 대도소를 전주․삼례․원평 그리고 광주․남원 등지에 두었는데 원평도 농민 통치가 아주 활발한 곳으로 전해졌다. 원평의 집강소 도접주가 김덕명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만하다.

그가 잡혔을 적에 기록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이놈이 크게 도소를 원평점에 설치하고 사사로이 국가의 곡식과 국가의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평민을 침학한 자이다.” 또 그의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덕명이가 금구 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군대에 쓰이는 관고의 물건을 마구 빼앗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약탈하면서 혹은 관가와 혹은 마을에서 멋대로 날뛰며 소요를 일으켜서 분수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것이 그 끝 간 데가 없다 하기로….”(동학관련판결문집의 판결선언서 원본에 나옴)

이런 기록에서 바로 그가 금구 원평 집강소의 핵심 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어들였고 탐학한 지주를 응징하여 농민의 고통을 해결해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김덕명은 예전에 불만스레 대하던 문중의 토호들을 많이 구제해 주면서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하였다 한다. 당시 수천 섬을 추수하던 김 부잣집에 농민군들이 들이닥쳤다 한다. 그리고 수많은 장독을 깨부수어 장물이 개울을 타고 아랫마을에까지 흘러 넘쳤다. 또 밧줄을 집 기둥에 묶고 끌어당겨서 집을 허물기도 했다 한다.

이런 와중에도 그 집 식구들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점으로 보면 그는 잘못된 제도나 폐막(弊瘼)을 고치려 했을 뿐 살상에는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들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 전면적 대일항쟁에 나섰다. 이때에도 그의 관할 아래 있는 금구현에서는 김봉득이 5천 명을 이끌고 합류했고 원평에서는 송태섭이 7천명을 이끌고 합류했다(오지영의 <동학사> ). 그 자신은 전주와 삼례에서 총지휘자가 되어 전봉준과 함께 북상했다. 공주 전투에서 패전하고 지도부는 남하하여 원평과 태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해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원평 전투를 좀 더 설명하면 이러하다. 농민군 지도부는 전주에서 물러나와 잔여 농민군 5백~6백 명을 이끌고 원평의 뒷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12월 25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에까지 추격해 왔다. 이때 농민군은 산의 삼면을 지키며 ‘품(品)자’형을 이루어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산 아래 들판에서 원평천을 사이에 두고 산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몇 시간 동안 이렇게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자, 대관 최영학이 칼을 빼들고 산에 올랐다. 이에 양쪽의 일본군과 관군은 산으로 뛰어올라 37명을 죽였다. 농민군은 완강한 저항을 풀고 많은 무기와 양곡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전투는 꼬박 하루 낮 동안 계속됐다(<순무선봉진등록>).

이때 전투지역인 시장의 점포와 구미란이라는 마을의 집 40여 채가 불에 타고 나머지 집들도 파괴됐으며, 농민군이 지니고 있던 곡식 2백여 섬과 민가의 물건들도 깡그리 불에 탔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몸을 피했다(<순무사정보첩>).

당시의 정황을 두고 현지 주민의 증언들을 수집한 최순식(전 모악향토사연구소 소장)은 전투가 벌어진 남산일대에는 농민군의 시체를 묻은 공동묘지가 있다고 했다. 또 관군측에서도 이 일대 연로의 민가들이 불에 타서 목불인견이었다고 그 참상을 전해주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가 이 전투에 참여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덕명의 근거지는 폐허가 되었다. 김덕명은 이 광경을 보고 참담한 심정을 가늘 길 없었을 것이다. 김덕명은 전봉준과 헤어져 몸을 숨긴다. 이 전투를 끝으로 김덕명은 전봉준과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안정 절골에 있는 문중의 묘소를 관리하는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했다. 산지기는 폐사가 된 안정사에 부처를 모셔 놓고 무당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김씨 문중의 토호들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한다.

그러나 구명은커녕 이들은 오히려 관가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들도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겠지만 형제가 길을 달리하는 세상이었으니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바로 설날 이웃 고을인 태인의 수성군이 산지기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이 김덕명에게 짚둥우리를 씌우고 상투와 양쪽 팔을 묶어 끌고 가자, 설 준비로 부산하던 부녀자들은 그가 끌려가는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다 한다. 김덕명은 일본군에 넘겨졌고 서울로 끌려와 전봉준 등 다섯 명의 지도자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덟 살 난 그의 아들 재홍과 네 살배기 재규는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뒷날 그의 뫼는 안정 절골의 산중턱에 쓰였고, 원평 전투가 있었던 산에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김씨 문중에서는 비록 고발은 했으나 그가 처형되고 나서 정부에 로비를 벌여 시체라도 찾아왔다고 전한다. 어쨌든 다른 농민군 지도자들보다는 사후에 조금 나은 대접을 받았다 하겠다. 그런데 2007년 그의 증손자가 김덕명의 묘소를 문중합동묘역으로 옮기면서 귀중한 원형을 잃고 말았다.

김덕명의 장손 김병일씨는 “글쎄, 별로 아는 게 많지 않아. 아버지께서 통 동학혁명이나 할아버지에 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김덕명의 장손인 병일씨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겸손함으로 말을 뗐다. 김제군 금산면 삼봉리의 거야마을에서 궁핍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 들었던 얘기는 남부럽지 않게 살던 할아버지가 동학란으로 잡혀 죽고 재산도 다 없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뒷날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고향마을을 등지지 않고 열 살도 채 안된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도리어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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