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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최시형

굳은 의지로 동학을 키워낸 순교자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최보따리는 최시형의 애칭이다. 그는 끝없이 잠행하면서 보따리를 자주 쌌는데 여기서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해월선생’이라 부르기보다 어딘지 측은하게 느껴지는 이 별명을 애칭으로 불렀다.

최제우의 후계자
1863년(철종 14) 겨울, 최제우는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 잡혀 있을 적에 그는 대구로 와서 여러모로 최제우의 옥바라지를 했는데 종으로 가장하고 최제우에게 접근했다. 그는 최제우의 당부에 따라 대구를 빠져나가 도망했다. 이것이 그의 긴 도피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최시형의 본명은 경상(慶翔)이다. 최경상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최경상은 열일곱 살에 조지소(造紙所)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생계를 이어야 했다.

열아홉 살에 밀양 손씨를 맞아 장가를 들었는데 첫째 부인이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경주 신광면 마북동에 정착했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보고 집강執綱(면, 리의 행정사무를 보는 사람)으로 천거했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이 일을 보았는데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그가 최제우를 처음 만난 것은 1861년 여름으로 보인다. 이때 최제우는 새로운 교를 창도하고 포덕문을 지어 돌리며 천도 또는 동학이라고 명명했다.

최경상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은밀하게 최제우를 찾아와서 도를 물었고 얼음물로 목욕을 하며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최제우의 옷을 지어 바치기도 하고 최제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쌀과 돈을 마련해 보내기도 했다.

최제우는 1863년 6월에 통문을 내어 경주에서 접소를 열었는데 각지에서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때 최제우는 최경상을 북도의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천도교교회사』). 이것은 바로 도통의 전수를 뜻한다. 이후로 최제우는 경주 남쪽의 포덕에 전념하면서 그 북쪽은 최경상에게 맡겼다. 여기에서 북접의 용어 사용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최경상은 대구에서 빠져나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으면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영양 일월산 아래 용화동 죽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65년 가을에는 동학의 탄압이 뜸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교도들을 모아 스승의 순도 기념제례와 탄신제를 올리고 이 자리에서 그는 동학이 실천해야 할 이념 또는 현실 인식을 밝히는 중요한 강론을 펼쳤다.

이필제 유도로 영해부 기습
1870년(고종 7)에 들어 그는 강원도 양양에 있었다. 최경상은 이필제가 교조를 신원하려한다는 말을 듣고 1871년 2월 영해로 이필제를 만나러 갔다. 이때 이필제의 주도로 교도 등 5백여 명을 모아 천제를 지내고 밤을 틈타 영해부로 쳐들어갔다. 봉기꾼들은 영해부 관아를 점령하고 하룻밤 호기를 부리고는 이튿날 영양 일월산으로 퇴각했다(『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 권7 신미년 3월 15일조).

일월산에 진을 친 이들은 관군의 수색이 심하자 뿔뿔이 흩어졌다. 조정에서는 영해부 습격에 동학도가 관련되었다 하여 동학도에 대한 일대 수색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른바 동학에서 큰 수난사로 기록되는 신미사변이 일어난다. 최경상은 다시 숨어서 성명을 바꾸고 일꾼이 되어 밭을 일구고 나무를 하고 고기를 잡고 새끼를 꼬면서 지냈다.

교단을 재건하다
1875년 10월에는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의 교도를 모아 스승의 제사를 거행하면서 자신을 주인, 충실한 제자인 강수를 차주인(次主人)으로 선포하고 열두 사람의 이름과 자를 시(時)자와 활(活)로 개작하게 했는데, 우선 세 사람에게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은 시형(時亨)(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기술한다), 강수의 이름은 시원(時元), 전성문의 이름은 시명(時明)으로 정했다. 교단의 조직을 정비하고 체계를 세우려는 고심에서 나왔을 것이다(『도원기서』). 이후에 그는 적절하게 이 ‘시’자를 붙인 호칭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지어주었다.

이제 그는 최경상에서 최시형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최시형은 병자수호조약 등 조정에서 개항을 단행하면서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다시 포덕에 더욱 열중했다. 특히 강원도를 중심으로 해서 벌인 그의 활동은 가히 동학의 부흥운동이라 부를 만했다.

1878년 겨울에 들어 그는 동학교단사에서 빛나는 일을 벌였다. 그는 북접(北接)을 표명하고, 최제우가 북방에 운이 올 것을 말한 대목을 빌려 북접 대도주를 정식으로 표명했다. 그리고 최제우의 모든 글을 간행하기 위해 인제에 도적편집소(道蹟編輯所)를 두고 일을 서둘렀다. 이어 동경대전 간행소를 두고 자금을 염출하고 판각을 하여 역사(役事)를 마쳤다. 또 단양에서 가사를 찍어 나누어주고 옥천에서 『동경대전』 1천 부를 찍어 교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일은 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들어 동학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인물들이 최시형을 찾아왔다. 곧 그들은 손병희, 손천민, 황하일, 서인주 그리고 윤상오 등이었다. 그리고 교단조직을 6임(六任)으로 정비하여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두었다. 이들 조직은 시기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골격은 천도교가 창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1885년 5월에는 유명한 보은 장내(마을 사람들은 장안으로 부름)로 접소를 옮겼다. 그 뒤 때때로 최시형이 관의 눈을 피해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장내리는 동학의 본거지가 되었다.

1887년은 그의 회갑이 되는 해였다. 그는 회갑연을 치른 뒤 ‘북접법헌(北接法軒)’이라는 첩지를 만들고 ‘해월장(海月章)’이라는 도장을 찍어 6임에 나눠주었다. 이것은 곧 동학의 정통을 의미했지만 뒤에 남접과의 분란이 있을 적에 하나의 계파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다
1888년 1월에 들어 그는 다시 뜻깊은 걸음을 걸었다. 전주로 가서 기도식을 거행하고 삼례로 와서 머문 것이다. 이때 그 유명한 마당 포덕을 행했다. 이때부터 동학이 전라도 지방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공주로 와서 접소를 열고 나서 부안, 고부, 태인 등지를 다니며 전라도 포덕에 열중했다. 특히 정읍 지금실에 가서 김기범(김개남의 본 이름)의 집에 머물렀고, 원평의 김덕명도 만났다. 전라도 일대에 동학교도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 북쪽의 황해도 등 전국에 걸쳐 동학이 퍼졌지만 당시의 체제를 부정하고 폭력적 방법으로라도 현실과 대결하겠다는 세력들이 끼어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성분에 대해 어윤중은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하여 이들을 일러 ‘위동학당(僞東學黨)’이라 불렀다(어윤중 「선무사재차장계宣撫使再次狀啓」).

이들은 관권의 탄압에도 예전처럼 도망만 가지는 않았다. 정면대결을 시도하여 무기를 입수하고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도주 최시형으로서도 제대로 제재할 수 없었다. 이 해 7월 서인주와 서병학이 교조의 신원을 위해 상소운동을 벌일 것을 최시형에 간청했다. 그러나 최시형은 이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 이에 이들은 10월에 자의로 도인을 공주에 모아놓고 감사 조병식에게 강경한 항의문을 보냈다.

이들이 계속해서 교주에게 압력을 넣자 최시형은 마지못해 삼례집회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서인주 등이 주동이 된 삼례집회에서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동학을 탄압하지 말라는 항의의 글을 보냈다. 강경파들은 삼례 모임에서 복합상소를 계속 추진했다. 이 결과 1893년 2월 북접계통의 서병학, 박광호 등 많은 교도가 서울로 올라와 상소문을 들고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복합 시위를 벌였고 고종은 “좋은 조치가 있을 것이니 가서 기다리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조치를 취했다.

이 해 3월 11일에는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을 위해 전국의 교도 수만 명이 집결했다. 이것은 북접이 주도한 보은집회이다. 이때에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누어져 그들의 행동을 놓고 논란을 벌였지만 어윤중이 왕명으로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이때 전봉준이 주도한 남접세력 수만 명은 금구의 원평집회를 갖고 동정을 엿보다가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이들도 일단 행동을 멈추고 해산했다.

동학농민전쟁과 남북접의 갈등
1894년 3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고부에 이어 무장에서 봉기하고, 이어 각지에 격문을 보내고 나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다. 이에 최시형은 통유문을 교도들에게 보내 만류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남접과 북접을 한 무리로 보고 단속했으며, 북접계통에서도 최시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각지에서 봉기를 일삼았고, 북접 내의 서인주, 황하일 등도 행동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남접에서 2차 봉기를 단행하며 북접의 호응을 여러 차례 요구해오자, 최시형은 이에 손병희에게 대통령기(大統領旗)를 주었고 손병희는 논산에서 전봉준을 만나 척왜양창의기(斥倭洋倡義旗)를 내걸고 연합전선을 폈다.

이때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에서 잠행하고 있었다. 그는 장수, 남원, 임실 등지를 다녔는데 공주, 원평, 태인 등지에서 패전한 뒤 남하한 손병희와 임실 조항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다시 북상하여 금산, 무주를 거쳐 영동에 닿았다. 영동 용산장터에서 격전을 치른 뒤 이들은 관군에 쫓겨 보은 종곡리에 와서 다시 격전을 치렀다. 그런 뒤 다시 관군과 일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최시형은 이 농민전쟁 중에, 임신한 아내가 감옥에서 다리가 부러지며 유산을 겪었고 열일곱 살 된 딸과 외손녀는 관에 잡혀서 청산의 통인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또 많은 측근의 교도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30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강시원을 잃기도 했다.

도통을 전수하다
최시형 일행은 다시 기약 없는 잠행길에 나섰다. 이들은 강원도로 달아나서 인제, 홍천을 헤매 다녔다. 1896년 1월 그는 손천민에게 송암, 김연국에게 구암, 손병희에게 의암이라는 도호를 내려 도통을 전수하고 이 세 사람으로 하여금 합의체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이를테면 그는 2선으로 물러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북접법헌을 용담연원(龍潭淵源)으로 고쳐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모습을 탈피했다. 아마 이때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동학이 퍼져 있어 충청도와 강원도 등 특정지역의 이미지를 풍기는 ‘북접’이라는 호칭을 불식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1898년에 최시형은 홍천에서 체포를 모면했는데 이해 3월에 그는 치악산이 바라보이는 원주 서면 송동으로 거처를 정했다. 교도인 송경인이 상금과 공을 탐내 그를 밀고해 마침내 붙잡혔다. 그렇게 은신술에 뛰어났던 그도 제자의 배반으로 잡힌 몸이 되었으니, 천운이 다한 것인가?

그는 평리원 재판장 조병직과 판사 조병갑에 의해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6월 2일, 일흔두 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아픈 몸으로도 동학의 주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외웠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문도들에 의해 경기도 광주 땅에 묻혔다가 뒤에 여주 천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시천교역사』).

그는 스승과 같이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죽었지만 그에게는 반역죄가 붙지 않았다. 그는 친일파로 변신했던 이용구의 주선으로 신원되었고 동학교단도 이용구에 의해 공인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의 장난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는 인간 평등을 가르친 종교실천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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