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사상과 의열투쟁
항일기의 아나키즘운동은 전면적 무력투쟁과 민중의 직접혁명을 강행하는 운동이었다.
노동자와 농민 등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보았으며, 직접 행동에 의한 사회 혁명을 주장했다. 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 조직적 기반등이 없는 식민지 민중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건 의열투쟁만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수단이었던 것이다.
흑우회
- 1923년 일본 동경에서 박열, 정태성 등이 결성한 이래 평양 안주 단천 철산 등 각 지방에서 결성된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중앙집권과 강권주의 배격, 자유연합주의 강조 빈천계급의 해방과 우상숭배 배격을 목적으로 했다. 1927년 이홍근, 최갑룡 등이 주도하여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1924년 4월 신채호, 이회영, 이을규 등이 중국 베이징에서 결성했다.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하여 아나키즘 선전, 독립운동 이론 제공, 공산주의와 이론 대결 독립운동 진영의 순수하지 못한 면 비판 등에 힘썼다. 특히 민족주의 일부의 실력 양성론이나 공산주의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두에 강한 반론을 펼쳐 반일, 반공적 자유연합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은 1928년 7월 중국 난징에서 결성된 아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의 국제 연대 조직이다.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출신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하였으며,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기치로 삼아 국제적 협력을 통해 식민지 해방과 사회혁명을 추구하였고, 조선 측 대표 인물로는 박열이 활동하였다.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
-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9년 중국 만주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김종진, 이회영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으며, 무장 투쟁과 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조선의 해방과 무정부주의적 이상 실현을 목표로 했다. 특히 청년 교육과 사회 개혁을 중시하며 민중 중심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9년 평양에서 조직된 무정부주의 계열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이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일제 타도를 목표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결합한 사상을 지향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최갑룡, 이홍근, 조중복, 임중학, 유림 등이 있으며, 선전 활동과 노동자·농민 조직화에 주력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당시 민중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화한인청년연맹
-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회영과 아나키스트들이 상해에서 다시 모여 결성하였다. 유자명을 의장으로 추대하고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파 숙청 등을 주도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자치론이나 참정론, 공산주의자들의 운동을 함께 비판하며 직접 행동을 통한 자유연합사회의 구연을 주장했다.
항일구국연맹
- 1931년 10월 한, 중, 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결성한 국제적인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이다. 이회영이 의장격인 기획위원을 맡았고 중국인 왕야차오가 무기와 재정 조달을 책임졌다. 산하조직으로 5개부서와 직접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두었다. 흑색공포단은 왕정위등 친일 중국인을 저격하는 한편, 일본 영사관들과 군수물자 운반선 등을 폭파했다.
이회영
-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6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고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고 고종의 망명을 시도했다. 1910년 전 가족 40여명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21년 신채호와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벌이며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1932년 지하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다례으로 가던중 붙들려 심한 고문 끝에 순국했다.
엄순봉
- 본명 엄순봉으로 경북 영양에서 출생했다.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뒤 백정기, 정화암 등과 상하이에서 활동했다.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이용노를 처단하고,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
- 1880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신문을 통해 글을 발표하며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권력집중에 반발해 자유연합적 항일 직접투쟁을 전개했다. 역사연구에도 힘써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1928년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중 붙잡혀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오면직
- 일명 양여주로 1894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했다.신문기자로 일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전념했다.1922년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한 김립을 처단하고 1929년 정화암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1935년 맹혈단을 조직하고 상하이 일본 수뇌 암살등을 주도하다가 치열한 시가전 끝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김좌진
- 김좌진은 대한제국기에 애국계몽운동으로 신민회와 대한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제국 이후에는 대한광복회를 창설하였다. 특히 1920년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며,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혁신회의,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며 활약하다 1930년 만주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을규
- 충남 논산 출신으로 3.1 운동 직후부터 독립대동단에서 활동하며 1919년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옥고를 치렀다.그후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4년에는 이회영, 이정규, 유자명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1929년에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해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다.
유자명
- 유자명은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단,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등에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으며, 광복 후에는 외교관 및 공직자로 중국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을 역임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이정규
- 이을규 동생으로 일본 유학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3년 후난성에서 이회영, 중국동지 진위기 등과 이상촌을 설립했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1924년 상하이의 철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했으며 백정기등과 푸젠성 민단편련처 활동에 참가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정화암
- 정화암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승려 및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불교 임제종의 승려였으며, 3.1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또한, 흑색공포단, 상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도 앞장섰다. 해방이후에는 불교계의 중흥과 민족운동을 이어나갔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원심창
-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3.1 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박열 등이 결성한 흑우회에서 활동했다. 1929년 4월 일본 도쿄유학생학우회의 폭력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갔다.1933년 3월 흑색공포단 단원들과 육삼정 의거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 출옥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열
- 1902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고 비밀결사인 불령사를 결성, 1923년 가네코 후미코와 천황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었다. 1926년 재판 과정에서는 판사가 두 사람의 사진을 유출, 국사범을 우대한다 하여 일본 정계에 파문을 일기도 했다. 광복으로 23년 만에 석방되었으며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