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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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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대숲골)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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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대숲골)공소

  • 시대근대(19세기말∼20세기 초)
  • 소재지정읍시 내장동 쌍암리 927

상세정보

송죽(松竹)마을은 내장저수지(內藏貯水池)에서 동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솔터(松竹), 대숲골(竹林), 동석(銅錫)의 합성지명이다. 松亭의 '松'자와 죽림의 '竹'자를 따 松竹이라 불린다. 처음 (진주강씨(晉州 姜氏)가 터를 잡고 광산 김씨가 이주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는 고흥 유씨가 주성(主性)을 이루고 있다. {戶口總數』와 {舊 韓國 地方行政區域 名稱一覽』에 정읍현(井邑縣(井邑郡)) 동면 송정리(松亭里)로 기록되어 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자료에는 쌍암리에 죽림(竹林)과 송정(松亭)마을이 보인다. 보통 대숲골을 '웃뜸', 솔치를 '아래뜸'으로 부른다.
대숲골은 말 그대로 주변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붙여진 마을이라 한다. 그러나 '대'가 대나무(竹)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크다는 뜻의 '大'를 의미하는 말로 보고 큰 숲이 우거진 골짜기란 뜻에서 유래된 지명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는 지형이 대소쿠리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내장산의 9개의 봉우리 가운데 바다를 볼 수 있다 해서 붙여진 망해봉(望海峰)을 중심으로 보면 동북쪽이 대숲골로 지형이 대소쿠리 모양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지형과 주변 여건은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의 피난처로서는 더없이 좋은 것이었다.
이곳은 주로 충청도와 전남 담양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한 마을로 구전되고 있다. 충청도는 순조(純祖 15년(1815))에 경상도·강원도와 더불어 박해를 받았는데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을해교난(乙亥敎難)이라고 부른다. 신자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에 많이 있었고 경상도나 강원도에는 거의 천주교가 전파되지 못한 상태였다. 순조(純祖 27(1827))년에는 전남 곡성에서 교도간의 사분(私紛)으로 밀고가 있어 이것을 도화선으로 전라도는 거의 전도가, 경상도에서는 상주(尙州), 순흥(順興), 안동지방(安東地方)이, 그리고 충청도 단양과 서울에서는 이 해 2월부터 5월까지 약 5백명이 검거되고 10여명이 사형되는 박해를 입은 바 있었다. 이를 정해교난(丁亥敎難)이라고 한다. 을해(乙亥)·정해(丁亥) 두 교난(敎難)을 피해 내려온 교우들이 어느 경로를 통해서 이곳 정읍까지 내려왔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대숲골 마을은 '녹두밭웃머리'라 불릴 만큼 척박한 땅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지금은 재배하지 않는 예팥을 주로 심으면서 산의 5부 능선까지 개간하여 화전(火田)을 일구고 조와 수수 그리고 담배농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정읍 최초로 천주교가 전래된 과교동 신성리 공소(科橋洞 新城里 公所)와는 산길로 4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근방의 교우들끼리 혼인이 이뤄지기도 했다. 실제로 입암면 등천리에서 이 마을로 시집온 조옥례 할머니(85세)가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공소(公所)건물은 1930년대 초가집이었던 것이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1965년에 정면 4간, 측면 2간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다시 지은 집이다. 6.25를 전후해서는 마을 주민 35가구 전부가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교우촌이었으나 지금은 이농으로 마을 주민 4가구 가운데 3가구만이 천주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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