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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교지와 최숙빈(거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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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교지와 최숙빈(거산교)

  • 소재지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상세정보

태인면 거산리(泰仁面 居山里)에 있는 다리다. 옛날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남도(南道)로 가는 교통의 요로(要路)이다. 그때 이 길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데 다리가 없어져 불편했었다. 300여년 전에 태인 백암리(泰仁 白岩里:현 七寶面 白岩里)에 살고 있던 박잉걸(朴仍傑)이 사재(私財)로 홍수가 나면 유실되었던 장대석(長大石)으로 완고하게 다리를 만드니 「큰다리」라 불러 대각교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은 거산교(居山橋)라고 한다.
숙종(肅宗) 때 둔촌 민유중(屯村 閔幼重)이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부임을 가는 길에 이 다리에서 쉬어 가는데 그 일행 앞에 지나가는 거지 소녀가 여덟살 짜리 민군수(閔郡守)의 딸과 너무도 닮아, 출신을 물으니 성은 최씨(崔氏)며 부모가 돌아간 무의탁한 소녀였다. 비록 옷은 남루하나 용모가 단아하고 총명하며 잘 생긴 소녀여서 데리고 가 잘 길렀다.
숙종(肅宗)이 첫부인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자 왕후 민씨(閔氏)를 선택하니 그가 바로 민유중의 딸이였다. 그때까지 민씨 왕후는 대각교에서 얻은 최씨를 옆에 두고 있었다. 그 뒤 숙종은 장희빈(張嬉嬪)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국은 민씨왕후(閔氏王后)는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최씨는 밤이나 낮이나 민씨왕후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어느날 밤에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때마침 암행(暗行)에 나섰든 숙종이 이를 발견하고 옛주인을 사모하는 갸륵함에 감복하여 왕곁에 두게 되어 결국은 왕자를 나으니 그가 바로 뒷날의 영조(英祖)이다. 최씨 부인은 상궁(尙宮)에서 숙빈(肅嬪)으로 승격되었다. 최숙빈은 고향인 태인에서 현감에게 명하여 친척을 찾았으나 한사람도 없었고 부모의 묘(墓)도 찾지 못하였다.
최숙빈은 태인현 최사령(崔司令)의 딸이라고도 하나 확인된바 없다고 한다. 다만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숙종 20년 9월 13일에 영조를 낳았으며 숙종 44년(1718年) 3월 9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英祖) 4년에 박필현(朴弼顯)의 난(亂)이 났을 때 영조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하여 관대(寬大)하게 용서했다고 한다.
1979년 모래 채취 작업을 하던중 발견된 대각교 유지(大脚橋 遺址)는 지금의 대각교에서 200m쯤 하류(下流)로 내려가서 제방의 북쪽 논 가운데에서 장대석(長大石)을 찾아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태거교(泰居橋) 태인현지(泰仁縣誌:英祖 年間)에는 대각교(大角橋)로 쓰여져 있으니 원래의 대거교가 대각교로 개칭된 것이다.
이 대각교는 지금은 서울 목포간의 국도(國道) 1번 도로가 그 윗쪽에 나게 되어 폐교(廢橋)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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