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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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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하청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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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사지

  • 소재지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166

상세정보

1928년 이희봉(李喜鳳), 권영모(權泳謀), 민영석(閔泳碩) 등 도내 유림 34인이 발의하여 창건(創建)하고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鑽), 오계엽(吳啓曄), 박재규(朴在珪), 박재구(朴在救)를 향사 하였는데 1950년 6.25사변(事變)으로 소실되고 동의 기념비(同義紀念碑)만 남아있다.

향사인물(享祠人物)

최익현(崔益鉉: 1832∼1906)

관(貫)은 경주(慶州), 자(字) 찬겸(贊謙), 호(號)는 면암(勉庵)으로 1832년(純祖 33年 癸巳)에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태어났다. 화서 이항노(華西 李恒老)에게 배우고 185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고 1873년(高宗 10年) 당시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書院撤廢) 정책에 반대하여 제주도(濟州島)로 귀양을 갔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다음해 6월 태인(泰仁)에서 무성서원(武城書院)을 중심(中心)으로 임병찬(林炳鑽)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쟁(抗爭)하다가 일본 대마도(日本 對馬島)로 잡혀가 단식(斷食)하다가 절사(節死) 하였다.

임병찬(林兵瓚)

평택 임씨(平澤 林氏)로 자(字)는 중옥(中玉)이요 호(號)는 둔헌(遯軒)이다. 1851년에 옥구(沃溝 大寺里)에서 출생하였다. 재질이 뛰어났고 16세때 전주 향시(全州 鄕試)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 절제사(順天鎭 節制使)에 이르러 농정(農政)으로 치적이 많았으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에 돌아왔다.
1894년(高宗 31年)에 무남영(武南營: 全州) 영관(領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태인 종성리(泰仁 宗聖里)에 공자묘(孔子廟)를 세우고 후진 교육(後進 敎育)에 힘썼다. 1906년 최익현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를 하였으며 1916년 5월 23일 거문도(巨文島)에서 단식(斷食)으로 절사(節死) 하였다.

오계엽(吳啓曄: 1857∼)

관(貫)은 동복(同福)이며 호(號)는 영화당(迎華堂)이다. 1856년에전남 동복(全南 同福)에서 출생하여 벼슬은 의관(議官)까지 지냈으며 최익현과 창의(倡義)를 하였다.

박재규(朴在珪: 1857∼)

밀양(密陽)이 관(貫)이고 호(號)는 남파(南坡)이다. 전남 나주(羅州)에서 1857년에 출생했다.
학덕(學德)을 갖춘 인물로 벼슬에 나아가 여러 구을을 맡아 다스렀다.

박재구(朴在救: 1853∼)

관(貫)은 밀양(密陽)이며 호(號)는 삼면(三勉)이다. 1853년(4年) 전남 창평(昌平)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고매하였고 기격(氣格)이 뛰어난 인물(人物)이다.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최익현과 창의(倡義) 하였다.

案 內 文

林炳瓚(韓末 字 中玉 號 遯軒 義兵將)
1889년(高宗 26年) 僉和中樞府事 兼 五衛將이 되었다가 樂安郡守 兼 順天 鎭同僉節制使에 전임 1894年이 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스승崔益鉉과 함께 義兵을 모집하여 4백여명을 인솔하고 淳昌에서 日本軍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隆熙 3) 崔益鉉과 함께 對馬島에 유배 2年만에 돌아와 1910年 王의 특명으로 嘉善大夫가 되고 獨立義軍府 全羅南道 巡撫大將이 되어 抗日 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1914年 日本 경찰에 체포되어 巨文島에 유배되고 1916年 단식으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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