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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서원 남고서원 남고서원 남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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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서원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76호
  • 지정일1984년 04월 01일
  • 시대조선 선조10년(1577년) 창건/광무3년(1899년)재건
  • 소재지정읍시 북면 보림1길 392

상세정보

이 서원(書院)은 1577년인 선조(宣祖) 10년(丁丑))에 창건(創建)하여 호남(湖南)의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재(一齋) 선생과 그의 제자(弟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건제 김천일(建齊 金千鎰) 선생을 배향(配享)하였다.
효종(孝宗)때부터 사액(賜額: 임금이 書院의 이름을 지어 주며 懸板을 내려 주는 것)하여 주기를 상소(上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85년인 숙종(肅宗) 11년(乙丑) 4월에야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사액(賜額)되었으며, 그 해 예조좌랑(禮曹佐郞) 한성우(韓聖佑)를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이 서원은 이 지방 선비들의 학문(學文)의 도장(道場)으로 일재 이항(一齋 李恒) 선생의 문집(文集)과 그 목판(木板)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1871년인 고종(高宗) 8년(辛未)에 조령(朝令)으로 철폐(撤廢)되어 단(壇)을 만들어 제사(祭祀) 지내다가 1908년 유림(儒林)들의 발의(發議)로 강수재(講修齋)를 세우고 1927(丁卯)년에 서원(書院)을 중건(重建)하여 매당 김 점(梅堂 金 ), 율정 김복억(栗亭 金福億), 용 암 김승적(龍巖 金承績), 매헌 소산복(梅軒 蘇山福)을 추배(追配)하고 있다.
1970년(庚戌)에 국가보조(國家補助)를 받아 서원을 고쳤고, 1975년(乙卯)에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로부터 문화재(文化財) 제 76호로 승인되어 1977년(丁巳)에 또 국가보조를 받아 단청(丹靑)을 했다.

지금은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각각 제사(祭祀)를 드린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祠宇)를 비롯하여 내삼문(內三門), 강당(講堂), 외삼문(外三門)등이 있다.
사우(祠宇)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맛배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건물은 잡석의 축대(築臺)위에 세워졌으며, 기둥의 앞면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나 건물자체는 모두 네모난기둥(方柱)을 사용하였다.
전면 가운데는 사분합(四分合)의 교살문의 있으며, 좌우 양측에는 같은 형식의 외여닫이를 달아 드나든다.

역시 잡석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면 4칸, 옆면 3칸의 강당(講堂)은 가운데의 2칸은 대청(大廳)이며, 좌우에는 방(房)을 두었다. 이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기둥은 사우(祠宇)에서처럼 퇴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건물 자체의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대청과 퇴 사이에는 사분합(四分合) 띄살문을 달았다. 두리기 둥아래에 놓은 주초(柱礎)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하였으므로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그만큼 소박하고 옛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서원(書院)의 유래는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조선 중종(中宗) 36년(辛丑)인 1541년 에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그 때 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서원사(書院史)의 시초(始初)이다.
그는 안유(安裕)의 사당(祠堂)을 짓고 그 左右에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집을 지어 주자 (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서원(書院)은 선현선사(先賢先師)를 모시는 사당(祠堂)인 동시에 사설 교육기관(私設 敎育機關)으로 근세조선의 최초의 기관이였다.
그 때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바로 뒤여서 많은 사류(士類)들이 정치와 손을 끊고 향촌에 들어와 오직 학문을 일삼고 후진(後進) 양성에 힘을 쓰게 되어 선비들이 서원에 모이게 되었다.

그 뒤 명종(明宗) 5년인 1550년에 풍기(豊基) 군수로 있던 이 황(李 滉)이 경상도 감사(監司)에게 글을 보내 임금께 송(宋)나라 백록동서원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편액(扁額과 賜額)과 전토(田土)와 노예(奴隸, 學奴)를 내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경상도 감사는 그대로 임금께 아뢰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賜額)과 오경(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典) 등을 하사(下司)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 것이다.
그 뒤 소수서원을 계기로 각지에 많은 사액서원이 서게 되였다.

제사 받는 사람(享祀人物)

이 항(李 恒)

성주인(星州人)이다. 자(字)는 항지(伉之)이고, 호(號)는 일재(一齋)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일재(一齋)는 1499년인 연산 5년(己未)에 서울 신혼동(新婚洞)에서 출생하였으며, 문열공 (文烈公) 조년(兆年)이 후손이다.

어려서 용력(勇力)이 아주 좋아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장차 무관(武官)으로 출세하려고 했으나, 30여세(餘歲)때 큰아버지 판서공(判書公)의 훈계(訓戒)를 듣고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하(門下)에서 대학(大學)등 사서(四書) 공부하고 주자십훈(朱子十訓)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벽에 써 붙이고 무섭게 정진하였다.
그 뒤 41세에 어머니와 남하(南下)하여, 태인(泰仁) 분동(粉洞)으로 와서 보림사(寶林寺)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일재(一齋)라 이름하고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면서 많은 제자(弟子)를 길러냈다.

김린후(金隣厚), 기대승(奇大丞), 허 엽(許 曄), 노수신(盧守愼)과 도의(道義)로 사귀며, 관찰사(觀察使) 송린수(宋隣壽), 현감 신잠(縣監 申潛)이 찾아와 문학론치(問學論治) 하였다.
이 항(李 恒)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1566년인 명종(明宗) 2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이 되고, 임천군수(林川郡守)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선조(宣祖) 초에 의빈경력 선공감부정(義賓經歷 膳工監副正) 등을 역임하고 장령(掌令)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浩闊) 모든 경서(經書)를 관통하였다. 또한 이기(理氣)의 철학에도 독보적인 체계를 이루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1865년인 고종(高宗) 2년(乙丑)에는 문경(文敬)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1499년에 낳아서 1576년에 이 생을 마쳤다

김천일(金千鎰)

언양(彦陽) 김씨이며, 선조(宣祖)때 의병장(義兵將)이다.
字는 사중(士重)이며, 호(號)는 건재(健齋)이다.
1537년인 중종(中宗) 32년 2월에 나주(羅州)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 밑에서 자랐다.
이 항(李 恒)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여 학문이나 덕행으로 김하서(金河西), 유미암(柳眉巖), 김린후(金隣厚), 유희춘(柳希春)등 선배를 찾아 종유(從遊)하기도 하였다.
선조(宣祖) 6년인 1573년(癸酉)에 그 학문과 덕행으로 거일(擧逸: 科擧를 치루지 않고 발탁되는 것)로 천거(薦擧)되어 군기사(軍器寺) 주부(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에 제수(除授)되었고,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있을 때 동면(東面. 지금의 城壽面) 유포리(柳浦里)에 가정재(可貞齋)와 구고면(九皐面) 선학동(仙鶴洞)에 용암서당(龍菴書堂)을 세워 후진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

1578년인 선조(宣祖) 11년에 사헌부 지평 수원부사를 지내고, 잠시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592년인 선조 25년(壬辰)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주(羅州)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등과 창의(倡義)하여 조정으로부터 판결사(判決使)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의 명을 받고, 왜적(倭敵)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軍資金)을 얻었다.
왜적이 퇴각하자 적을 추격하라는 명을 받고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여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황 진(黃 進), 고종후(高從厚), 장 윤(張 潤) 등과 사수(死守)를 다짐했었다.

그후 적병이 성벽을 넘어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城)이 함락하여 아들 상건(象乾)을 안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그 때가 1593년계사(癸巳)이다.
선조(宣祖)때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그 뒤에 충장(忠壯)이라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나주(羅州) 정열사(旌烈祠), 진주(晉州) 충열사(忠烈祠),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임실(任實)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사(祭祀) 지내고 있다.

김 점

부안김씨(扶安金氏)이다.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유학자(儒學者)이다.
자(字)는 경숙(敬叔)이고, 호(號)는 매당(梅堂)이다.
석옥(錫玉)의 아들로 부안(扶安) 옹정(瓮井)에서 태어났다.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 항(李 恒) 문하에서 손꼽히는 인재(人才)이다.

명종(明宗)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후에 천거(薦擧)되어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사화(士禍)로 세상이 어지러워 지자 그만두고 고부(古阜) 우일(雨日)에서도 살았고, 망제산(望帝山)아래 오공동(五公洞: 지금 井邑市 農所洞 望帝 부락) 골짜기 석벽 (石壁)아래에 척심정(滌心亭)을 짓고, 기대승(奇大升), 김린후(金麟厚)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후진양성에 진력 하였으며, 그 곳에서 소요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지금도 척심정 유허비(滌心亭 遺墟碑)가 서 있다.
8대손(八代孫) 영수(永洙)가 쓴 가상(家狀)이나, 세자(世子),세마(洗馬) 이도중(李度中)이 쓴 행상(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보아도 낳고 간 연대(連帶)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복억(金福億)

도강김씨(道康金氏)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문신(文臣)이며 의병(義兵)이다.
자(字)가 백선(伯善)이며, 호(號)는 율정(栗亭)이다.
1524년인 중종(中宗) 19년(甲申) 고현내(古縣內: 지금의 七寶面)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재 (誠齋) 김약묵(金若默)의 아들로 이 항(李 恒) 문인(門人)이며 기대승(奇大升), 정 철(鄭 澈), 이준민(李俊民)과 서로 사귀었다.

선조(宣祖) 2년(乙巳)인 1569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목청전(穆淸殿) 참봉 (參奉)에 제수(除授)되고, 얼마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옮겨졌다.
선조(宣祖) 6년(癸酉)인 157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회덕현감(懷德縣監), 사옹원(司饔院) 판관(判官),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내고, 김제군수(金堤郡守)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재종제(再從弟) 군자직장(軍資直長) 김후진(金後進: 遠慕堂), 계제(季弟) 주부(主簿) 김경억(金慶億), 재종질(再從姪) 별제(別提)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김여백(金如白: 遠慕堂의 큰아들), 이수일(李守一: 李一齊 의 큰아들),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등과 같이 의병(義兵)과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진중(陣中)에 보냈다.

선조(宣祖) 26년(癸巳)인 1593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고, 뒤에 이천부사(利川府使)에 除授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지은 호(號)를 사우당(四憂堂) 이라 하였으니, 네가지 근심은 신우(身憂), 도우(道憂), 군우(君憂), 민우(民憂)를 말한 것이다.
선조(宣祖) 33년(庚子)인 1600년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일흔일곱살(77歲 이었다.

김승적(金承績)

언양김씨(彦陽金氏)이며, 字는 누립(累立)이며, 號는 용암(鎔巖)이다. 1549년인 명종(明宗) 4년(己酉)에 금구(金溝) 거야(巨野)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높으며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여 사림(士林)들로 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던 사람이다.

일재(一齋)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588년인 선조(宣祖) 21년에 나이 40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했으나, 과거(科擧)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과 양친(養親)에만 뜻을 두고 힘쓰니, 그 지극한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음인지 이적(異蹟)이 많았다고 전하여 내려 온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아우와 같이 시묘(侍墓)생활을 하고, 만년(晩年)에는 조폭동(造瀑洞) 용추(龍湫) 위에 두어칸(間)) 집을 짓고, 편액(扁額)을 용암(龍巖)이라 했다.
1588년에 생을 떠났다.

소산복(蘇山福)

진주인(晉州人)이다. 자(字)는 경응(慶鷹), 호(號)는 매헌(梅軒)이며, 국필(國弼)의 아들 이다.
남원(南原) 적과방(迪果坊) 만적동(晩迪洞)에서(지금 남원시 덕과면 만동) 1556년인 명종 (明宗) 11년(丙辰)에 태어나, 어려서 이성춘(李成春)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형 해복(海福) 과 같이 이 항(李 恒)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다.
머리가 명석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함은 물론 특히 천문 (天文)과 산학(算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1591년인 선조(宣祖) 24년(辛卯)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이듬 해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했으며,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를 왕래하기도 했다.

직산(稷山) 싸움에 나갔으나 병으로 돌아왔고, 뒤에 부모 상(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하며 종군(從軍)하지 못하고, 김천일(金千鎰)이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니 함께 죽지 못했음을 탄식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 수칸(數間) 집을 지어 평액(扁額)을 문류정 (門柳亭 또는 梅軒)이라 하고, 민여주(閔汝住), 오정길(吳廷吉), 김 선(金 宣), 이 점(李 漸), 안창국(安昌國), 최 행(崔 荇), 양명원(梁明遠), 안극충(安克忠) 등 여러 명사(名士) 들과 종유(從遊)하며 만년(晩年)을 보냈다.

1620년인 광해(光海) 12년(庚申) 11월 19일 세상을 마쳤다.

남고서원 묘정비문(南皐書院 廟庭碑文)

우리나라 문명(文明)은 실로 고려말에 시작되고, 유현(儒賢)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에는 조선조의 명종(明宗) 선조(宣祖)조에 이르러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능히 기질(氣質)을 변화하여 의(義)는 정(精)을 해치고, 인(仁)은 더웁게 하여 호남(湖南) 사림(士林)을 창도(唱導)하게 되어 엄숙하게 영원토록 사표(師表)가 된 것은 우리 일재(一齋) 문경공(文敬公) 이(李) 선생보다 위로 나은 사람은 없다.

퇴계(退溪) 선생은 일찍이 호남(湖南) 이학(理學)의 창도자(唱導者)가 되었다고 일컫고, 송강 정문청공(宋江 鄭文淸公)은 또한 말하기를 『호남에 일재(一齋)가 없었다면 좌임(左 : 未開한 상태)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니, 그가 한 때에 존중(尊重)되고, 그 공(功)이 후세에 까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사람들은 영원토록 제사 지낼 것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

선생은 휘(諱)가 항(恒)이요. 성은 이(李)씨이니 관향은 성주(星州)이며, 고려조의 명현인 매운당(梅雲堂)선생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의 후손이다.
젊어서는 용력(勇力)이 혼자서 몇 사람을 당해낼만 하였고, 30세가 되는 동안을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였다.
이미 경계가 되는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어 글을 읽으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큰 유학자(儒學者)가 되어 조정에서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수선(首選) 되었으며, 문도(門徒)들이 몇 도(道)에 두루 있어 모두 선생의 말로써 시귀(蓍龜: 吉凶을 점침. 점치 는데 쓰이는 점대와 귀갑)를 삼고, 선생의 행지(行止. 행하는 일과 끝이는 일))는 척도(尺度)로 삼았다.

있는 비는 풍화(風化. 풍습이 고쳐짐)됨이 울연(蔚然. 흥성한 모양)화여 오래되도록 마지 아니하였다.
이로써 누차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청원이 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높이 우러른바 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선생의 문하 출신으로 당세의 영걸(英傑)이 많았는데 거기에서 더욱 저명한 분인 즉 건재 김문열공 천일(健齋 金文烈公 千鎰)이 수제자로 학통(學統)을 이었고, 임진왜란에 순절한 매당 김공 점(梅堂 金公 )이 어짐(仁)을 지켜 도회(韜晦: 학문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 하며, 율정 김공 복억(栗亭 金公 福億)의 학행(學行)을 돈독히 하고 군량을 수송함과 용암 김공 승적(龍巖金公承績)의 도움으로 보답함이 자공(子貢)에 비김과 매헌 소공 삼복(梅軒 蘇公 山福)의 독실하게 학문하고 충성을 다함은 이것이다.

호남의 태인(泰仁)은 선생이 일생을 마친 곳이 되었다. 선조조(宣祖朝) 정축(丁丑. 단기 3910년)년에 사림(士林)들이 서원(書院)을 창립하고 선생을 향사(享祀)하니, 이미 건재 문열공은 배향(配享)되고 숙종조(肅宗朝) 을축(乙丑: 단기 4018년) 4월에 사액(賜額)하고, 그 후 증직(贈職)이 내려 졌다.
고종조(高宗朝) 무진(戊辰. 단기 4201)년의 서원 훼철(毁撤)때 이 서원도 또한 그를 면치 못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선생을 생각하고 61년을 넘겨 그대로 두지 못하고, 드디어 다시 발의하여 중건하고, 매당(梅堂)과 율정(栗亭)과 용암(龍巖)의 3공(公)을 아룰러 배향하고, 그 후 46년 된 계축(癸丑. 단기 4306)년에 또 매헌(梅軒)을 추배하고, 지금까지 궐향(闕享: 祭祀를 지 내지 못함)하였던 제전(祭典)을 다시 이어 하니, 여러 사람이 사모하였던 정이 비로소 흡족하게 되었다.

임자(壬子: 단기 4305)년에 내가 일을 맡을만한 사람이 못 됨에도 외람히 재정(齋長)을 맡음으로써 재중(齋衆)의 장보(章甫)인 송흥섭(宋興燮)과 소재명(蘇在明)과 이임석(李任錫)의 제우(諸友)가 청하여 말하기를『이 서원을 세운지 역사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그간의 흥폐(興廢)의 연혁(沿革)과 더불어 모든 선생의 사적(事蹟)을 적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기에 묘정(廟廷)에 비를 세우고자 하니 그대가 비문을 지어 주기 바라네』라고 하였다.
나는 견문이 좁음을 덮고, 감히 받들지 못함에도 높이 우러른 마음 절실하여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위하여 또한 감히 종내 사양치 못하였다.

오직 이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다만 향사(享祀)로서 능사로 삼는 것은 아니니, 다시 선생의 학문을 배움으로써 언행을 신칙(申飭: 단단히 일러서 경계함)하고 덕업(德業)을 숭상(崇尙)함으로써 이 서원을 광명성대(光明盛大)케 하여 선생의 도(道)로 하여금 이로 말미암아 회복을 기하여 세상을 밝게 함이며 이는 받들어 힘씀을 위함이다.

때는 계축(단기 4306)년 3월 하순
화산(花山) 권 순 명(權 純 命) 근 찬.
여산(礪山) 송 성 용(宋 成 鏞) 근 서.

남고서원 중수비문(南皐書院 重修碑文)

문경공(文敬公) 일재(一齋) 이(李) 선생이 별세한 이듬해 선조(宣祖) 정축(丁丑: 단기 3910))년에 문인 건재(健齋) 김문열공(金文烈公)이 유림들을 창도(唱導)하여 태산(泰山. 泰仁고을의 古號)의 보림산(寶林山) 아래에 사우(祠宇)를 짓고, 신령을 편안케 한 것은 실로 거기가 선생이 강학(講學)하던 곳이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 문열공(文烈公. 金千鎰)을 배향하고, 숙종 을축(乙丑. 단기 4018)년에 사액(賜額) 함으로써 이를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하였다.
선생은 호걸의 자질로서 의리지학(義理之學. 經書의 해석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성인의 도리를 연구하는 학문(성리학)을 한, 실로 백세(百世: 영원한)의 스승이다.
젊어서도 굳세고 용감하여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아니 하였는데 도리어 도를 닦고 순수함에 이르렀다.

아! 선생은 조예(造詣: 학문이나 기예가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감)가 정순(精純)하고, 밝아 행하였던 실력을 나 같은 말학(末學: 미숙한 학문, 학자의 謙稱)으로서는 이왕의 문헌으로써 하면 과실이 적을 것이다.
조정에서 존숭(尊崇)하여 권하는 일 같은 것은 명종(明宗) 선조(宣祖) 때에 임금의 후한 대우로써 역마(驛馬)를 보내어 불러도 헛되이 기다리기를 다섯 차례이고, 의원은 보내 문병하기를 네 차례며, 선정신(先正臣)이 일컫기를 퇴계는 『호남의 理學의 宗師이다.』라고 하고 율곡은『실천함이 독실하다』라 하고 우암은 『도(道)는 이루어지고 덕은 섰다』라고 하였다.

사림(士林)들인즉, 누차 상소하여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을 어떻게 여긴가를 가히 알 수 있다.
나라를 점칠 때 공은 성학(聖學, 유학)에 있음이라. 만약 문열공(文烈公)이 선생의 수제자로써 임진왜란에 용기를 내었으니, 정학(正學: 올바른 학교, 여기서는 儒學)과 정충(貞忠: 절개가 곧고 충성함)은 마땅히 영원토록 제사지내야 한다.
이 서원은 실로 소자(邵子. 소옹-雍-)의 낙사(洛社)와 회옹(晦翁: 주희-朱熹-, 주자)의 녹동(鹿洞)이 있는 것처럼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여기에 의지하여 도타움에 돌아가니, 일국의 대원(大院이. 큰 서월)이 되어 있으나, 불행히도 고종(高宗) 신미 (辛未. 단기 4204)년에 싸잡혀 훼철되니, 학자들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그 후 정묘(丁卯. 단기 4260)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복설(復設)하여 매당(梅堂) 김공(김 점. 金 ), 율정(栗亭) 김공(김승적. 金承績), 용암(龍巖) 김공(김복억. 金福億), 매헌(梅軒) 소공(蘇山福)이 모두 문하의 뛰어난 분으로 공(功)이 당세에 있었던 학자들이다.

서원이 세워진지 오래되어 풍우로 닳고 헐러 그 면모를 보전키 어렵게 되니, 후손 근석 (根錫)과 원임(院任: 서원의 임원)들과 더불어 주선과 협력으로 도모한 바 도(道) 및 군비 (郡費) 2천여만원을 판득(辦得)하여 정묘(丁卯. 단기 4320)년 여름에 사우(祠宇) 건립에 착 공하며, 안팎 삼문도 비가 새여 썩으므로 다시 수축하고, 토대와 담장들을 넉달을 걸려 완 공을 고하니, 서원 모양이 유신되어 영령들도 기뼈하고 즐거워 할것이며 사기도 더욱 높아졌다.
이로 인하여 선새의 도(道)는 하는 가운데의 해와 달이니, 어찌 그날이 없었을 것으로 알았으리요.

진실로 홍지사(知事)와 김군수(郡守)의 선현(先賢)을 사모함이 성실하고 돈독함에 선생의 덕이 사람에게 들어감이 깊다는 것을 가이 실없는 말이 아님을 알겠다.
역사(役事)가 이미 끝나서 서원의 뜰에 비를 세워 그 사적을 표하는데 집강(執綱: 서원의 임직의 하나)인 김환국(金煥國)이 잘못해아려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으니, 분수에 넘쳐 감당치 못하겠으나, 이름을 참열(參烈)케 하는 영예가 되므로 사양치 않고, 높이 우러러 사숙하는 마음 지극함으로써 그 시말을 간략히 서술한다.

또 비를 세우는 역사에 대하여서는 본손인 평촌리(平村里)에 거주하는 희정(喜正)이 전담하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단군 기원 4320년 정묘 음 7월 상순
후 학 거 창 신 사 범(愼 思 範) 근 찬.
후 학 장 흥 고 광 준(高 光 俊) 근 서.

서원 중건기념 비문(書院 重建記念 碑文)

원사(院祠: 聖賢이나 忠臣등을 모시는 서원이나 사묘)에 은덕을 갑는 것은 일러서 덕행이요. 일러서 정충(貞忠: 절개가 굳고 충성스러움)이요. 일러서 학행이요. 일러서 연원(淵源: 근원 즉 학문을 전수한 근원)이니, 이에 그친 자는 고제(古制: 옛적의 제도)요, 괴걸(걸출 함)한 바로써나 세력있고 부유한 바로써나, 권장한 바와 기회를 얻은바로써 추천된 자는 정규로 된 것이 아니다.

공이 있어 사묘에 제사 지냄은 권세로써 수행됨이요. 고을의 스승을 서원에 향사(享祀)함은 우러러 사모함을 붙임이라.
칠보산 아래에 보림의 유지는 산자수명하고 땔나무와 식량생산이 풍부하니, 세속로도 마땅하고 학술을 강술하고 연마하는 데도 마땅하다.
골이 깊고 시내가 길어 물소리는 잘잘하고 산사(山寺)의 저믄 연기에 종소리는 은은히 들려온다.

시냇가의 수양버들에는 꾀꼬리가 가지 사이로 날아 베짜는데 북이 왔다갔다 하는듯 하고, 산 보통이 늙은 느티나무에는 자고 새가 살고 있다.
오래된 절 가는 갈림길에 지팡이 집고 걸어가는 소리 들린 듯하고, 선황당과 관왕묘에도 적토마(赤兎馬: 관운장이 탔던 말 이름)의 방울소리가 들린 듯 하니, 참으로 여기는 신선이 사는 집이요. 무능도원(武陵挑源: 별유천지, 별 세계)인가 의심날 정도다.
우리 문경공(文敬公) 일재(一齋) 선생은 늦게 학문을 좋아하여 부끄러움을 물리치고 시골로 내려와 이 터를 가려 몇 칸의 집을 짓고, 성인(聖人)의 이치를 궁구하여 밝히는데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하니, 경향(京鄕)의 유학생들이 책을 짊어지고 와 문전성시(門前成市)하였다.

날로 강술하고 달로 연마 함므로 학문이 증진하여 강학과 예의를 익힘으로 영재가 배출하니, 충의와 도학의로 온 세상에 명성을 드날렸으며 읍양순속(揖讓純俗: 예를 다하여 사양하고 풍습을 인정이 도탑게 함)하여 유풍(儒風: 유자의 풍습)이 크게 떨쳤다.
퇴계와 율곡 송강 우암도 그의 경륜을 극찬하니 호남에서의 명성은 온 나라 조야에 모두 일컫게 되었다.
천년된 늙은 소나무는 만고풍상의 괴로움을 겪고도 항상 푸르고 일생의 높은 절개는 백번 꺾으려 해도 오직 빛났다. 선생이 서거하니, 동량(棟梁)이 꺾인 것으로 홍유(弘儒: 학문과 덕이 높은 이름난 선비)의 자리가 비였다.

문헌이 오히려 새로우니,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가 묘갈명을 짓고, 현석(玄石, 박세 채-朴世菜-)이 유고의 서문을 적었으며,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시호(諡號) 내리기 를 청하였고 삼연(三淵, 김창흠-金昌翕-)이 사액(賜額)을 청하니, 두 번 상소하고 세 번상 소로 숙종께서 윤재(允栽)하니, 남고서원에 사액됨은 을축(乙丑, 단기 4042)년 4월이라.
국왕께서 예관(禮官)을 파견하고, 미수(眉 , 허 목-許 穆-)가 제문을 지어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고,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를 배향하다.

그 후 추배(追配)에 어진 제자 매당(梅堂) 김공(김 점-金 -), 용암(龍巖) 김공(김복억- 金福億-), 율정(栗亭) 김공(김승적-金承績), 매헌(梅軒) 소공(소산복-蘇山福-)의 6위을 병 배(幷配)하니, 유림들과 본손(本孫)들이 극히 치성을 드리다.
행운이 숭환하고 여러 대가 바뀌면서 묘우(廟宇)가 퇴락함에 여러차례를 보수하였으나, 경오(庚午. 단기 4323)년 여름 장마에 사당집이 무너져 6현의 위패를 강당으로 이안(移安)하고, 이 일을 당하여 고유하지 어언 해를 넘긴지라. 계책을 도모하였으나 재원이 군색하여 속수무책(束手無策)이더니, 유림들이 상의한 바 본도(本道)에 원조를 청하였더니, 본원정이며 도지사인 최용복씨의 특별 배려로 국고에서 3천만원을 지급받아 신축하니, 서원의 모습이 일신되어 그 골안에 광채를 발하여 근원에서 모두 칭송하니, 사기가 갑절이나 떨치게 되었다.

작년부터 고사(庫舍)가 또 퇴락한 바 전 군수 허동일(許棟一)씨가 지원 재가 하였으나 준공하지 못하고, 지금의 군수 김성연(金成淵)씨 재직중에 준공하니, 신축공사비가 2천 5백만 원이며, 주방도구는 이씨 문중에서 자담하니 이러한 거사에 관한 일을 기록해 새기지 않고서는 먼저의 일을 본받고 뒤를 비추어 줌을 어찌 밝게 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일재 문임(一齋 門任. 일재선생의 후손인 임원)인 이준상(李準相)이 보는 서원에 대한 일의 협조에 적극 참여하며, 주선으로 본손인 이수남(李秀男)이 흔연히 비건립의 역사를 전담하고, 각 문중의 헌성도 적지 않았으며, 유상 이근석(李根錫)은 불고 가사하고 종시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감독하니, 경박한 세상이며 말세의 타락한 풍속에도 이같이 너그러이 용납함인지 돌은 스스로 서지않고 글을 스스로 쓰이지 않을 것이 세속의 상례이다.

유본장보(儒本章甫)가 나에게 글을 위촉하니, 소위 재임(齋任, 제에 있는 儒生 중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굳이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았으나 칠십을 바라보는 환국(煥國)은 본시 거칠고 옹졸하여 어찌 감당 하리오만은 선생의 경력은 문헌을 고증할 수 있으니 어찌 감히 군말을 할것인가.
후일의 군자여 수즙하고 보강하여 선은(先恩)을 갚고 성원(聲援)에 보답하여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어찌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외람히 이를 담당하게 되어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한다.

단국 기원 4325년 임 신 청명절.
후학 도강 金 煥 國 근기
후학 장흥 高 光 準 근서
문정공 15대손(광주) 李 秀 男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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