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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깨비까지도 부르던 재주
작성자 관리자

정산(鼎山), 송규 종사(宋奎 宗師)는 달마산의 연달아 있는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한가운데 허봉(許峰)이 방긋 솟아 있는 산자락 아래 초가 마을 그곳,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星州郡 草田面 韶成洞)에서 서기 1900년 8월 4일 아버지 구산(久山) 송벽조(宋碧照), 어머니 준타원(準陀圓) 이운외(李雲外)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만남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기묘한 것이다.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하며 고심참담하고 있던 정산종사(鼎山宗師)는 누군가 귀인을 만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바로 김해운(金海雲)과의 만남이었다.
정산이 김해운을 만난 것이 바로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북 정읍시 북면 화해리(北面 花海里)에 살고 있던 김해운이었다.
김해운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총명하고 단아한 여자 불자(佛子)였다.
해운은 김제군(金堤郡) 원평의 이모집에 내왕하며 구남수(具南守 : 김제 출생으로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를 시봉함)를 만나 '대원사에서 참 도인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산종사를 찾은 것이다.

해운이 정산을 처음 보자 놀라고 황홀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 곳도 구김이 없는 초연하고 원만한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고 신광(身光)이 발하여 바라보기도 송구스럽고 민망할 정도였다.
그 후 정산과 해운은 수 차례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만나는 기회가 많아지자 마음의 벽도 더욱 차차 없어져 존경하면서도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해운이 정산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정은 날로 깊어 갔다.
1918년 봄, 해운은 자기의 집에 정산을 모시고 싶었다.
몇 번인가 그 뜻을 비쳤더니 정산은 허락을 해 주었다. 해운은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해운은 정산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됐다.
자기 집이라고 해야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해운의 아들 김도일(金道一)의 칸막이 방에 모셨던 것이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적고 환경이 깨끗하지 못할망정 모실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 해운은 영광스럽고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정산의 북면 화해리(北面 花海里)의 생활은 의미 깊고 심도 있는 기도(祈禱) 그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주문과 염불을 줄줄 외우고 하늘에 의존하는 마음 뿐으로 보였다.
해운의 집에 머무는 동안 정산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자상히 상담해 주었고 여러 가지 일들은 예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끔 신묘한 묘술을 부려 경이로운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어 해운은 그를 만국양반(萬國兩班)이라 불렀다.

한번은 해운이 아침상을 준비하여 정산 앞에 내밀었다.
정산은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눈을 속여 가며 반찬을 마련할 것까지는 없습니다.』하는 것이었다.
해운은 깜짝 놀랐다. 몸둘 바를 몰랐다.
어떻게 알고 계실까? 내가 남몰래 가져온 반찬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가 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누구나 가난하게 살기 때문에 반찬이라 해야 나물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해운은 날마다 올리는 밥상에 찬거리가 부족하여 민망하고 송구스러워 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잘산다는 딸의 집을 갔던 것이다.
딸의 집에 간 해운은 집에 이런 분을 모셨는데 반찬이 없어 미안하다는 뜻을 말했다.
그랬더니 딸은 걱정을 자초하는 격이라고 찬거리라도 줄 생각은 아니하고 오히려 관심없는 태도를 보였다.
해운은 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버선 속에다가 달걀 다섯 개를 넣어 치마 속에 숨겨와 밥상에 올렸던 것이다.
해운은 그 사실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정산의 혜안(慧眼)에 의하여 꿰뚫리어 비밀이 들통나고 만 것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전설로 전한다.
어떤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남은 떡을 장독대에 올려놓았는데, 정산이 도술을 부려 그 덕을 해운의 집으로 날아오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여 주위 사람들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한번은 가뭄이 계속되어 해운이 비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정산은 색깔 있는 물감을 풀어 채소밭에 뿌렸다.
그러면 채소밭에 이슬비가 내려 적셔주곤 했다.
그리고, 손님이 오고 갈 때는 미리 누가 언제 오고간다는 것을 해운에게 알려주었으니 참으로 신통한 재주요 신묘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날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도깨비가 정말 있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정산은 웃으며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메밀죽을 한 단지 쑤어 오라고 하였다.
주민들이 메밀죽을 쑤어 왔더니 날이 저물어 그 죽을 멀리 언덕에 놓아두게 했다.
그리고는 정산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주문이 한참 계속되자 멀리 죽그릇 옆에 도깨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도깨비불들이 오락가락 했다.
흔히 도깨비는 여자들이 쓰다버린 몽당비, 빨랫방망이, 부지깽이 이런 것들에 피가 묻어 도깨비로 변한다는데….
사람들은 신묘한 일이라며 혀를 차고 있었다.
후에 이런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정산종사의 모친 이운외(李雲外)는 아들이 스승을 따라 큰 뜻을 이루고자 전라도로 떠난 날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그 기도는 지성을 다한 간절한 애원의 기도였다.
기도를 하는 동안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인데 이들은 큰 강가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장(神將)하나가 나타나더니 정산을 옹호하고 강 위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강건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산을 환영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뚝한 부처님이 나타나 몇 걸음 다가오더니 정산을 맞아주고 정산은 부처님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림과 동시에 부처님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꿈은 영몽이었고 경사스러운 일을 알리는 길몽이었다.
정산종사와 소태산 대종사가 4개월 후에 만나자고 했던 바로 그날에 있었던 꿈이었다.
대종사와 만난 이후의 4개월은 정산종사에겐 생의 최대 안식이 있었던 기간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분을 만났으니 물같이 세월만 흐르면 자연히 만나 역사를 창조해 갈 것이기 때문에…
정산종사는 대종사께서 제의한 대로 의형제를 맺어 대종사의 동생이 되었다.
그후 정산은 대종사를 아버님, 스승님으로 모실 것을 다짐하면서 정들었던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을 떠났다.
떠나던 정산의 모습은 대원사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맑고 깨끗했다.
오히려 대종사가 의형제의 신표(信標)로 건네준 담뱃대가 정산의 청정한 손에 쥐어진 모습은 종교의 신심과 열정을 보여주는 듯 싶어 든든하게만 보였다.
지금, 전북 익산시 신룡동 원불교 중앙총부 구내에 정산 송규(宋奎) 종사(宗師)의 성탑(聖塔)이 서 있으며 정읍시 북면 화해리 마동(馬洞)부락에는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만난 땅을 기념하기 위하여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 비(碑)가 서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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