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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씨촌(殷氏村)의 정문(旌門)
작성자 관리자

백여년 전부터 고부땅 은씨촌(殷氏村) 건너 산기슭에 정문(旌門) 하나를 가까이 두고 고요히 잠들고 있는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에는 피눈물로 적시고 간 인생길의 아픈 애화(哀話)가 있었다.
고향을 담양에 두고 온 김서방과 부인 이씨(李氏)가 살고 있었다.
김서방의 어릴 때 이름은 금동이었으며 부인의 이름은 갑순이었다.
숲이 무성한 바깥 마을에서는 과부의 외아들인 금동이가 살았고, 안 마을에서는 과부의 외동딸 갑순이가 살았다.
길쌈이나 밭을 맬때도 두 어머니인 과부들은 서로 외로운 신세를 동정하며 품앗이를 하곤 했다.
금동이와 갑순이도 어머니들의 일을 할 때면 같이 뽕을 따거나 풀을 베거나 하였으며 두 사람의 사이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금동이와 갑순이의 나이가 스무 살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의 사이는 사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갑순이의 하얀 얼굴은 금동이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았고 금동이의 씩씩한 모습은 갑순이에게는 유일한 대장부로만 보였다.
그들의 어머니들까지도 금동이와 갑순이를 한쌍의 원앙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무언의 약속이 이뤄지고 있었다.

어느 해 봄, 두 사람의 결혼식은 거행되었다.
의좋은 부부가 탄생하였다하여 소문은 이웃 마을까지 자자했다.
그 후 금동이는 김서방, 갑순이는 이씨(李氏)로 부르게 되었다.
비록 농촌에서 살아가지만 이들의 꿈은 부풀어 있었고 논밭도 섬지기가 넘었으니 집안을 꾸려가는데 어려움이 없어 행복하기만 했다.
부부의 정은 말 할 수 없이 두텁고 훈훈했다.
그러나, 액운은 닥치고 말았다.
그들이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때부터 김서방이 심한 기침으로 인하여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몸은 쇠약하고 기침은 더해갔다.
가장 고질병으로 알려진 폐병을 앓고 있었다. 김서방의 어머니와 장모의 병간호도 지극하였고 아내인 이씨의 정성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부인 이씨는 남편이 하던 일가지도 도맡아 해야만 했다.
오뉴월 뙤약볕에 김을 매야하고 동지섣달 긴긴 밤엔 가마니를 치고 새끼를 꼬아야만 했다.
허나 부인의 힘은 너무 벅찼다. 병든 남편 공경도 어려운데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까지 병석에 눕고 말았다.
부인은 절망뿐이었다.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동네에서는 생과부의 뒤끝이 더욱 불쌍하게 되었다면서 수군수군 했다.

부인 이씨는 타관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병든 남편을 졸라 이사 가기를 결정하고 말았다.
가세는 극도로 기울어 가진 것이라곤 없었다. 부인은 남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도부 장사 모양으로 떠돌이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남의 집 사랑방 같은 곳에서도 자고, 모정 같은 곳에서도 자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끝내는 거지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여러 고을을 헤매다가 고부읍(古阜邑)에 이르러서는 어느 물방앗간 안에다가 잠자리를 차리고 병든 남편을 쉬게했다.
부인은 마침내 고부읍내 은참봉(殷參奉)의 집으로 밥을 얻으러 갔다.
몇 번이나 밥을 얻으러 갔는데 그 때마다 은참봉은 이 여인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은참봉은 "도대체 아무리 봐도 밥을 얻어먹을 부인 같지 않은데 무슨 까닭으로 걸인 행세를 하오?" 하고 물었다.
부인은 남의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알고 있었으나 어쩐지 털어놓고 싶어 남편을 만난 사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력을 이야기했다.
사연을 듣고 난 은참봉은 한참 무엇을 생각하더니
『거참, 안되었소. 중병(重病)을 여자의 힘으로 고치기는 어려울 텐데…좋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하고 말끝을 흐리며 여인의 눈치만 살피는 것이었다.
여인은 귀가 번뜩 뜨였다. 남편을 살리는 길이라면 무슨 일을 못할까 싶어
『제 남편만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고 하겠습니다.』 하자
은참봉은
『당신 남편을 내 집에다 따뜻이 모시고 좋은 약을 써 주며 일생동안 아무 불편 없이 해줄테니 부인은 이 집에 들어와서 내 혈족을 낳아줄 수 없겠소?』 하는 것이었다.

은참봉은 나이 오십에 자식이 없어 이씨를 후실로 맞아 아들을 낳고 싶은 생각이었다.
은참봉의 말을 들은 이씨는 몸이 벌벌 떨렸다.
남편의 수척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남편을 좋은 집, 좋은 밥, 좋은 방에 모시고 싶은 생각에 머리가 숙여지고 있었다.
이씨는 대답을 뒤로 미루고 남편이 누워 있는 물방앗간으로 왔다.
이씨는 밤이 새도록 남편을 불러만 놓고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르기만 하고 말을 못하는 이유를 알아챈 듯 남편은
『내가 귀찮으니 나를 떼어놓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게지?』 하는 것이었다.
이씨 부인은 울면서 은참봉이 들려준 말을 털어놓고 말았다.
남편은 입을 열었다.
『여보 그런 말이면 왜 진작 못했소? 내가 꽃같은 당신을 데려다가 수년 동안을 부부의 낙 한번 없이 지난 것도 미안한 일인데 거기다가 나의 병 때문에 고생하는 당신을 차마 더 볼 수가 없소. 그러니, 은참봉 하라는 대로합시다.』 하고 간절히 권했다.
이후 이씨는 은참봉의 후실로 들어가고 남편은 백동(白銅)화로에 약탕관을 올려놓고 비단 이불과 요를 깔은 은참봉의 집 별당에 눕게 되었다.
여인은 울고 있었다. 여보, 여보, 남편을 부르며 울었다. 은참봉과 첫날밤을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무얼 그리하오. 당신 덕에 내가 이렇게 편안히 있을 수 있지를 않소.』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서방의 아내 이씨는 은참봉의 후실로 들어가 아들 3형제를 낳았다.
그러나, 부인의 전 남편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식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밤에는 은참봉의 방에 들어갔다가 새벽만 되면 전 남편의 별당체로 찾아오곤 했다.
이러기를 어언 10년. 은참봉은 인품이 중후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후덕한 사람이었다.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기에 그는 중병객 김서방을 데려다 놓고 온갖 좋은 약을 다 쓰며 정성스럽게 간호해 주었던 것이다.
드디어 김서방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례식 날이 임박하자 은참봉은 꽃상여를 만들게 하고 양지 바른 곳에 산소를 마련하고자 산에 가고 없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저녁때가 되어 은참봉이 집에 돌아왔을 땐 이씨가 가슴에 칼을 꼽고 전 남편의 시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동안 당신의 은혜를 많이 입었소이다. 자식까지 두었지만 일편단심으로 생각하다 남편을 쫓아갑니다. 전생에 무슨 팔자로 자기 아내를 남의 품속에 재워가며 그 곁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얻어먹고 지내던 전 남편의 피눈물 나던 일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만들어 준 내가 어찌 그 앞에 같이 죽어서 사죄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 아들 셋을 낳아 주었으니 그중 하나는 꼭 김서방의 아들로 대를 잇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김서방을 한 무덤에 묻어 주시고 해마다 명절이 오거든 자식으로 하여금 잔이나 부어놓게 하여 주십시오.』
이러한 유서를 남겨 놓고 이씨 부인은 자살을 했던 것이다.
은참봉은 유언대로 한 무덤에 묻어 주고 아들 하나로 하여금 김서방의 대를 잇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관가에서는 이씨를 열녀로 표창하고 그의 무덤앞에 정문(旌門)까지 세워 주었다.
그리하여, 고부촌을 지나는 사람들은 『방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그대들 가엾은 부부의 영혼이로다』 하며 그 무덤 앞을 지나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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