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술(金澤述) : 학자 (1884~1954)

1884(고종 21)∼1954. 근세의 학자.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 아버지는 낙진(洛進)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로 석홍(錫洪)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서 수학을 시작하여, 15세경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900년 전우(田愚)를 사사하여 학문의 대도를 배웠는데, 이때 후창이라는 호를 받고, 창동처사(滄東處士)라 하였다.
32세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죽었을 때, 3년간 시묘(侍墓)하여 포로고행(圃老高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하였고, 또 장자를 왜교(倭校)에 입학시키라고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수차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광복 후 그 수정본을 발간하였다.
1930년경 늑삭령(勒削令)과 창씨령(創氏令)에 불응하여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은 받지 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하였다.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하여 일생의 고절(高節)을 수립하고, 후생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전우의 수재로서 일시의 사표로 칭송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출생지인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이 서원은 1975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창집》이 있다.

  • 관리부서문화예술과/문화예술팀
  • 연락처063-539-517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