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민(金齊閔) : 문신, 의병장 1527(中宗22)~1599(宣祖32)

정읍 덕천 도계리 출신. 본관(本貫)은 의성(義城), 자(字)는 사효(士孝), 호(號)는 오봉(鰲峯), 시호는 충강(忠剛). 호(顥)의 아들

일재이항(一齋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경사(經史)에 달통하였으며 1558년(明宗13)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1573년(宣祖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내직(內職)을 거쳐 화순(和順) 함양(咸陽)현감을 지내고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때마침 임진난(壬辰亂)을 당했다. 왜적이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임금이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왜적을 물리치고 임금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기로 결심. 각 고을에 <정외격문(征倭檄文)>(왜적을 정벌하자는 격문)을 모집하니, 정읍, 고창, 흥덕, 고부를 비롯한 각지에서 우국충정에 불타는 의사들이 삼례역으로 모여들었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66세의 나이로 몸소 북채를 들고 격려하며 의병들을 진두지휘하였고 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웅치전투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죽고 공의 아들 안(晏)이 죽는 등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마침내 웅치전을 승리로 이끌고 호남지역 의병들의 총궐기라고 할 수 있는 장성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 이평(梨坪)의 오치(鰲峙)아래 독서당을 짓고 후학을 훈도하고 시문을 저술하는 데에 힘썼으나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아들 엽(燁)과 흔(昕)에게 의병을 주어 권율장군에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게 하였다. 그 후로 공을 호남 3대 창의사로 추앙하여 칭송을 받았다.

1599년(宣祖32) 음 2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며, 선무훈(宣務勳)과 정사훈(靖社勳) 공신에 오르고, 인조 때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73년(顯宗14) 도계서원에 배향되고, 1794년(正祖18)에 장성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 배향되었으며, 1829년(純祖2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854년(哲宗5)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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