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全琫準) :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1855(哲宗6)~1895(高宗32)

고창읍 당촌리(高敞邑 堂村里)에서 출생. 본관(本貫)은 천안, 자(字)는 명숙(明淑), 별호(別號)는 녹두(綠豆), 창혁(彰赫, 亨鎬)의 아들로 부조(父祖)를 따라 전주 구미리, 태인 감산면 계봉리,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간다리, 조소리(鳥巢里)로 옮겨 살았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 조병갑의 거듭되는 악행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ㆍ무장(茂長)ㆍ금구(金溝)ㆍ정읍(井邑)ㆍ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ㆍ진멸권귀(盡滅權貴)ㆍ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에 이어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봉기 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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