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金浚) : 조선시대 무관, 1582(宣祖15)~1627(仁祖5)

고부 금정리(金井里, 現 井邑市 井一洞 門里) 출생. 본관(本貫) 언양(彦陽), 자(字) 징언(澄彦), 광필(匡弼)의 아들

1605년(宣祖38) 무과에 합격하고 선전관을 거쳐 교동현감(강화군)을 지내고 향리로 돌아와 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한 후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도총부 도사가 되고 죽산부사, 훈련원정을 거쳐 봉산군수,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지냈다.

1627년(仁祖5)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청군의 선봉진이 안주성을 육박해오며 항복을 종용해도 단호히 거절한 뒤 김준은 성안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적군을 완전히 격퇴시켰으나, 최후의 공격을 가해온 청군 앞에 병사 남이흥과 같이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사배하고 화약포대에 불을 댕겨 최후를 마쳤다. 아들 유성도 적병과 싸워 전사했고 김준의 첩 김씨, 세살 된 딸, 종 헌충과 출가했다가 근친 와 있었던 딸도 은장도로 자결했다.

인조왕은 “한 집안에서 아비는 충에 죽고 아들은 효에 죽고 첩은 열에 죽었으니 삼강을 갖추었다” 하고 삼강정려를 내렸다. 1632년(仁祖10) 향리 금정(지금 정문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임진왜란에 순절한 송상현, 신호와 함께 향사했다. 그리고 1657년에는 정충의 사액이 내렸다. 1681년 좌찬성에 가증되고 장무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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